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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뒷이야기

일본불매운동, 노무현처럼 계란으로 바위를 쳐라

경불진 이피디 2019. 7. 16.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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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과연 계란으로 바위를 깨뜨릴 수 있을까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우리는 흔히 불가능한 일을 빗대어 계란으로 바위깨기라 칭하죠. 절대 일어나지 않는 일, 그래서 포기해야 하는 일도 이렇게 말하고요. 그런데 정말 계란으로 바위를 깨뜨릴 수 없는 것일까요?

 

계란으로 바위를 쳐라란 노래가 있습니다. 가사를 읽어보면

 

껍데기가 조각 나 박살나도록 계란으로 바위를 쳐라.

마지막 한줌의 영혼일지라도 계란으로 바위를 쳐라.

 

흰자가 주르륵 흐르고 노른자가 바위에 붙어 끈적이도록 그 모양이 마침내 해골이 빠개져 바위에 걸쭉한 묵처럼 붙어질 지라도

 

계란으로 바위를 쳐라-!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계란으로 바위를 쳐라-!

산산히 쪼개여 부수어 버려라!

 

계란으로 바위를 쳐라-! 거대한 관습과 억압의 굴레를 계란으로 바위를 쳐라-!

 

빈민운동가 최인기씨가 만든 곡인데요. 많은 울림이 있죠. 그런데 그냥 울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곡의 가사처럼 계란으로 바위 깨기는 가능하다고 이미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바위의 약한 곳을 향해 계란을 던지면 그 곳에 계란의 잔해물이 스며들고 공기 중에 떠도는 씨앗이나 곰팡이가 이 잔해물의 영양분을 먹고 자라면 바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고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고도 바위가 깨진다고 합니다. 천년 만년이 아니라 몇 년 안에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절대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죠.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이 이를 증명하지 않았습니까. 지역주의를 깨드리기 위해 바보같은 무모한 도전을 계속 했던 노무현 대통령이 2002년 당시로는 불가능에 가까웠던 민주당 경선에 도전하면서 하셨던 말씀이 이거 였죠.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고만 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 번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감동적인 연설은 영화 노무현과 바보들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바보가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어제부터 알아보고 있는 불매운동이 바로 계란으로 바위깨기와 같은 어찌보면 바보같지만 우직한 역사였으니까요.

 

불매운동을 영어로 하면 보이콧(boycott)입니다. 신문이나 TV에 워낙 자주 등장하는 용어라 익숙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보이콧의 유래는 알고 계신 분 계신가요?

 

보이콧은 원래 사람이름입니다. 1880년대 영국의 퇴역군인 찰스 보이콧에서 나왔죠. 그런데 퇴역군인의 이름에서 보이콧이란 용어가 탄생했을까요? 이는 아일랜드 대기근이란 역사적 비극과 연결됩니다. 한 종류의 감자를 주로 키우던 아일랜드에 감자병이 번지면서 흉작이 시작됩니다. 감자 수확이 줄어드니 굶어죽는 아일랜드 사람들이 속출했죠. 섬나라 아일랜드가 그야말로 지옥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때 탈출했던 아일랜드인들이 주로 미국으로 향해 지금도 상당수가 있죠. 미국에서는 아일랜드 축제도 열고요.

 

아무튼 이렇게 상황이 악화된 배경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 대부분의 토지는 영국귀족 소유였습니다. 이런 토지를 귀족이 직접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콧 같은 퇴역군인에게 맡기죠. 일제가 일자리가 없어진 사무라이들을 우리나라에 보내 토지를 수탈했던 것처럼 말이죠. 아무튼 보이콧도 영국 귀족 소유의 드넓은 영지 관리 책임자로 아일랜드에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흉작으로 대기근이 발생하니 소작을 하던 아일랜드인들이 소작료를 25% 인하해달라고 요구합니다.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상황에서 당연한 요구였죠.

 

그런데 보이콧은 강경 대응합니다.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는 아일랜드인을 내쫓고 이에 불응하면 경찰이나 영국 군인을 불러 잔혹하게 탄압했습니다. 이때 아일랜드인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폭력을 폭력으로 대항했을까요? 아니면 굴복했을까요?

 

아일랜드인들의 선택은 비폭력 저항이었습니다. 그런데 비폭력으로 보이콧의 악행을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계란으로 바위깨기처럼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으실 것입니다. 폭력 앞에는, 매 앞에는 장사없다는 말처럼 말이죠. 하지만 아일랜드인들은 바위를 향해 계란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소작인들이 단합해 보이콧이 관리하는 영지에는 노동력을 공급하지 않기로 결의한 것이죠. 당장 벌이가 없어 굶어죽을 수도 있지만 모두가 용기를 내 힘을 합친 것이죠. 이들은 보이콧이 관리하는 영지에서 자란 작물의 수확도 거부했습니다. 소작인들의 목숨건 투쟁에 거의 모든 마을 사람들도 힘을 모읍니다. 상인들은 보이콧에게 생활용품을 파는 것을 거부합니다. 빵은 물론 휴지나 비누도 마을에서는 사기 힘들어졌다는 것이죠. 그러면 영국에서 받으면 되지 않을까요? 우체부들도 동참합니다. 보이콧에게는 소포는 물론 우편도 배달하지 않은 것이죠. 이런 움직임은 보이콧처럼 악독한 영국인들이 관리하는 영지로 퍼져나갔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을 좌절시켰던 배신자가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운동이 수십년 이어지면서 아일랜드 독립운동까지 이어졌죠. 결국 아일랜드는 독립을 얻었으니 계란으로 바위를 깨드린 것이죠. 이런 역사 덕분에 보이콧은 거절과 배척의 대명사가 됐고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에서도 보이콧이라는 단어를 쓰게 됐다고 합니다. 참고로 아일랜드 역사를 살펴보면 녹두꽃의 민비나 윤시윤 같은 배신자가 있긴 합니다. 그런데 이런 배신자를 아일랜드인들은 철저히 처단했습니다. 그래서 배신자가 이후로는 거의 나오지 않았죠.

 

이보다 앞서 미국에서도 유명한 보이콧, 불매운동이 있었죠. 바로 보스턴 차 사건. 미국 독립운동의 시초로 알려진 이 사건은 다들 알고 계시죠. 영국인이 1767년 수입한 찻잎과 기타 물품에 높은 세금을 물리자, 식민지 정착인들은 연합해 영국산 제품 수입을 보이콧했죠. 큰 손해를 입은 영국 측이 식민지인들이 더 강하게 수탈했고 이에 저항해 영국 배에 실려 있던 차상자를 바다에 던졌잖아요. 이후 독립운동의 물결이 거세게 일면서 영국은 물러났고요. 또 한번의 계란으로 바위를 깨드린 사건이 됐죠.

 

미국에서는 이후에도 계란에 깨지는 바위가 또 있습니다. 1955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들어보신 분 계신가요? 미국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시에서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가 백인 남성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면서 확산됐던 운동인데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미국 남부에서는 흑인차별이 극심했었죠. 버스는 물론 화장실, 식당 등도 흑인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많았잖아요.

 

그런데 로자 파크스가 시내버스의 좌석에 앉아 있다가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 시내버스에서의 흑백 분리를 규정한 몽고메리 시법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됐습니다. 당시 몽고메리에서는 버스 앞 네 줄은 백인전용으로 설정되어 있었으며 흑인들은 주로 뒤쪽에 있는 그들만의 유색 칸에 앉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버스 이용 인구의 약 75%는 흑인들이었죠. 그런데 이 칸은 고정된 것은 아니고 표시를 옮길 수 있었다고 합니다. 버스가 다 차기 전에는 중간에도 앉을 수 있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백인들이 탈 경우 양보해야 했다고 합니다. 만일 버스가 만원이 되면 흑인들이 내려야 했다는 것이죠.

 

로자 파크스와 마틴 루터 킹, 그리고 오바마 대통령

물론 많은 흑인들이 이에 저항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로저 파크스가 저항하다 체포까지 되는 것은 충격적이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흑인사회는 분노했죠. 파크스가 체포된 뒤 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NAACP) 의장인 닉슨(E.D. Nixon)의 지도 아래 이 지역의 흑인들은 집단 파업과 버스승차 거부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어 흑인 교회의 목사들과 다른 승차 거부운동을 벌이던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몽고메리진보연합(MIA)을 구성한 뒤, (Martin Luther King Jr.) 목사를 의장으로 추대하고 본격적인 보이콧에 들어갔죠.

 

이들은 간디의 비폭력 정신과 그리스도교 교리에 의거해 폭력 없는 시위를 전개, 5만여 명에 달하는 흑인들이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흑인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시 당국이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면서 시위는 장기전으로 돌입했죠. 이후 흑인들은 직장을 잃거나 해고 위협을 받았고, 카풀제를 자원한 운전자들은 면허증이 말소되거나 보험이 취소되는 등 갖은 불이익을 받았습니다. 특히 비폭력으로 저항하는 흑인들을 백인경찰들이 폭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합니다.

 

다행히 1956년 연방지방법원에 이어 대법원도 몽고메리 시 당국의 행위가 위헌이라고 판결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분노한 백인들이 폭력 저항에 나서죠. 악명높은 KKK단이 흑인들에 대한 폭력을 가합니다. 급기야 1963915일 버밍엄 16번가 침례교회에 대한 KKK의 폭발물 테러로 4명의 흑인소녀가 목숨을 잃는 참사도 발생하죠. 이후 그 유명한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중심으로 계란으로 바위깨기 도전이 시작됐고 이에 백인경찰들은 물대포와 최류탄을 퍼붓기 시작합니다. 이런 폭력진압에도 흑인들의 저항이 끊이질 않고 잔혹한 폭력 진압 영상이 TV를 통해 전해지면서 폭력진압에 항의하는 백인들도 늘어갔습니다.

 

그러자 19636월 케네디 대통령은 남부의 인종분리정책이 부도덕하고 잘못됐다는 것을 시인하고 흑인 민권에 대한 제안을 발표했죠. 이후 공식적으로는 버스는 물론 식당과 공원 등 공공시설에서 흑백차별이 일소됐습니다. 계란으로 바위가 깨진 것이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이 없어진 것도 비슷하죠. 이 밖에 친 이스라엘 기업 불매운동, 네슬레 불매운동, 나이키 불매운동, 엑슨모빌 불매운동 등도 큰 성과를 이뤘죠. 이처럼 계란에 깨진 바위는 의외로 많습니다.

 

여기서 잠깐. 경제 용어 하나만 챙기고 넘어가실께~~. 불매운동, 즉 보이콧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보통 1, 2차로 나누는 데요.

1차는 특정 국가와 기업의 제품을 구매하지 않는 것입니다. 앞에서 다뤘던 우리가 흔히 아는 불매운동이 여기에 해당하죠. 그럼 2차는 뭘까요? 보통 맥주를 마시는데요.ㅋㅋ

 

2차 보이콧은 1차 보이콧 대상이 된 회사와 거래 관계에 있는 제3자에게까지 거래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는 운동을 뜻합니다. 이는 주로 국제관계에서 발생하는데요. 예를들어 미국의 경우 20106월 이란의 원유를 수입하는 제3국에 대해 미국 내 거래를 못하도록 하는 세컨더리 보이콧 조항을 담은 이란 제재 법을 시행한 적이 있습니다. 이후 이란은 경제난에 시달렸고, 2015년 미국 등과 핵 협상을 타결했죠. 물론 트럼프가 이를 뒤집긴 했지만요.

 

북한도 마찬가지죠. 북핵 위협이 한창일 때 세컨터리 보이콧이란 용어가 자주 등장했습니다. 국제사회로부터 제재를 받고 있는 북한은 전체 무역의 85% 중국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은 북한을 고립시키기 위해 중국은행에 압박을 가하고 있는 것이죠. 이게 바로 세컨더리 보이콧(Secondary boycott)입니다.

 

다시 돌아와서요. 어제도 살펴봤듯이 최근 일본에 대한 불매운동이 점점 거세지자 많은 보수언론들이 불매운동 무용론을 꺼내들고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조선일보 못지않는 친일신문인 동아일보는 오늘자 사설에서 한국과 일본 내부의 합리적 理性이 목소리 낼 때다라고 주장합니다. 지금처럼 강경 대결로 계속 치달을 경우 한국 경제가 상당한 피해를 입을 것임은 명백하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냉정을 찾고 해결책을 얻어내기 위한 물밑 외교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상대방이 미친 놈처럼 주먹을 날리고 있는데 냉정을 찾고 자 정신차리세요라고 외치는 것이 가능이나 할까요?

 

조선일보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8일자 기사를 통해 일본계 회사인 소니코리아와 JTI코리아가 11일로 예정된 신제품 출시를 취소했다며 안타까웠습니다. 이들 업체가 웨스틴조선호텔과 남산 제이그랜하우스에 엄청난 위약금을 물면서까지 행사를 취소했다며 미안해하는 듯한 여운까지 남겼고요. 제버릇 개못주는 듯합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 국민들의 불매운동의 효과가 점점 가시화하고 있죠. 편의점과 마트 등에서 일본 맥주 판매가 최대 23.7%나 떨어졌다고 합니다. 한 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도 한·일 관계가 악화할 때마다 일본산 불매운동이 있었지만 그 영향이 크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직접적인 경제 규제라는 측면에서 불매운동 여파가 훨씬 빠르고 뚜렷하게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할 정도였죠. 놀라운 국민의식에 박수를 보내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튼 토착왜구들의 불매운동 무용론을 멋지게 물리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소비자 운동에서도 선진국인 영국에서 윤리적 소비를 권장하는 격월간 잡지 에티컬 컨슈머(Ehtical Consumer)’의 조언을 참조할만 합니다. 에티컬 컨슈머는 불매운동의 성공 요건으로 4가지를 제시하는데요.

 

1. 지지자를 확보하라

불매운동이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목소리에는 힘이 실리고 문제가 해결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죠. 이를 위해 불매운동 대상 상품이 판매되는 가게 앞에서 불매운동의 내용이 담긴 안내문 등을 나눠주는 것이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나라 중소마트에서 일본산 제품 판매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써붙인 것처럼 말이죠.

 

2. 언론을 활용하라

 

노스웨스턴대학의 브라이던 킹 교수는 1990년에서 2005년 사이 미국 내 언론에서 다뤄진 불매운동 사례를 분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상대로 언론이 관심을 가질수록 해당 회사나 국가 기관이 불매운동에 반응했다는 군요. 특히 언론 관심과 불매운동의 영향력은 강한 상관관계를 나타냈다고 합니다. 따라서 킹 교수는 불매운동을 시작하는 초기 단계에 미디어의 힘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3. 브랜드를 공격하라

 

흔히 소비자들은 불매운동을 했을 때, 기업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매출 하락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연구는 이와 다소 상반되는 결과를 보여주죠. 사실 단기적인 매출 하락보다 기업이 두려워하는 것은 브랜드의 훼손’, 즉 기업의 명성이 바닥에 떨어지는 일이라는 군요. 특히 브랜드가 손상되면 소비자뿐 아니라 경영진이 주주에게 신뢰를 잃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평소 이미지 관리 등에 신경을 쓰는 회사일수록 불매운동을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죠.

 

4. 명확한 목표와 언어를 설정하라  

불매운동의 성공을 결정짓는 요소 중 하나는 명확한 목표 설정입니다. 단순히 망해라가 아니라, 해당 기업이 잘못한 부분을 정확히 지적하고 그에 대한 개선안을 요구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 예로, 1990년대 아동노동착취 사실이 밝혀졌던 나이키에 대해 소비자들은 해당 내용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문구와 포스터 등을 활용해 보이콧을 진행했습니다. 특히 주요 활동가였던 제임스 키디는 직접 인도네시아에 방문해 노동자들과 같은 임금으로 살아보며 노동 대가의 불합리함을 적극적으로 전했습니다. 그는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최저임금의 3배에 달하는 생활임금을 지급할 것을 요구했죠. 이러한 불매운동에 나이키가 처음 적극적으로 대응한 것은 1998년이었습니다. 당시 CEO 필 나이트는 나이키의 상품이 노예 임금과 강제 초과 근무, 독단적인 남용의 대명사가 되었다며 노동자들의 최저 임금을 올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실제로 나이키는 공정한 노동과 인권 등을 관리하는 비영리 단체를 설립했으며 2005년에는 업계 최초로 그들과 계약하는 공장 전체 리스트를 공개했죠. 현재도 나이키는 매년 회사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약속, 기준, 회계 자료 등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불매운동의 성공 사례로 나이키가 꼽힙니다. 나이키는 단순히 노동착취 문제에 대해 사과하거나 이를 표면적으로 개선한 것이 아니라 지속가능성과 사회적 책임 등 기업에 요구되는 윤리 분야의 선구자 역할을 자처했죠. 당면한 문제를 해결을 넘어 더 큰 차원의 논의를 시작한 것입니다. 불매운동 대상인 기업이나 기관, 국가 모두가 나이키처럼 대응하면 좋겠건만, 잠깐 악어의 눈물을 비출 뿐 현실적인 여건은 전혀 변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인 게 실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망하긴 이릅니다. 왜냐면 나이키의 사례도 앞서 살펴본 계란으로 바위깨기였으니까요. 나이키 공장 노동자들의 저임금과 열악한 환경에 대한 첫 지적이 나온 것은 무려 1991년인데 적극 대응한 것은 1998년입니다. 무려 8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셈입니다.

 

여기에 에티컬 컨슈머가 언급하지 않은 불매운동 성공 요건으로 한가지를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바로 어제부터 이야기해온 배신자를 엄단하는 것입니다. 이번 불매운동과 관련해서도 국가와 민족을 배반하고 일본 편을 드는 토착왜구는 용서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매운동 무용론을 설파하는 친일세력을 단죄해야 합니다.

 

혹시 너무 심한 주장 아니냐고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일제 감정기는 이미 100여년 전 일인데 일본에 대해 아직도 반감을 갖는 것은 미련한 짓이라 생각하면서요. 실제로 대표적인 친일파 집안 후손인 자한당의 김무성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하죠. “어려운 합의를 박근혜가 도출해냈는데 대한민국 정부가 뒤집어서 지금 이렇게 한·일 간 국교가 굉장히 어려워졌다고요.

 

7일 자한당이 주최한 일본의 경제 보복 관련 긴급대책회의에서 이병태 카이스트 교수는 문재인 정부가 과거 정부들과 우리의 지난 역사를 자꾸 부정하고 적폐로 보지 말고, 과거 정부간의 협약은 협약대로 존중하면서 국민들의 자존심, 그저 어린애 같은 자존심, 이런 것에 의존하려고 하는 태도를 버렸으면 좋겠다는 황당한 주장을 했습니다. 일본 제품 불매 운동 등을 벌이는 시민들의 반일 감정을 그저 어린애 같은 자존심이라고 폄하한 것이죠,

 

이런 토착왜구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사례가 있습니다. 지난 318‘’토착왜구나베가 막말을 하는 경제학적 이유는?’에서 언급했던 사례인데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겨우 4년 여간 나치에 점령당했던 프랑스는 해방된 후 무려 12만명 이상을 나치부역죄로 재판에 회부했고 38000여명이 징역·금고형을 내렸습니다. 특히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도 6000명에 달했으며 실제로 1500명 이상을 처형했죠. 1945년에는 재판없이 처형된 사람도 9000여명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과거사 청산이 최근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1964년 프랑스는 전쟁 중 민간인에 저지른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없애 1994년 유대인 처형에 관여한 폴 투비에게는 종신형을, 지난 1998년에는 모피스 파퐁에게는 10년 금고형을 선고하기도 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가해국가였던 독일입니다. 나치와의 과거사 청산에 철저한 독일에서는 지난해 11월부터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경비병을 했던 요한 레보겐에 대한 재판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는 강제수용소에서 수백 명의 유대인 살인을 방조한 혐의로 기소됐는데요. 당시 그의 나이는 1820세로 청소년이었다고 합니다. 그럼 현재 나이는 얼마나 될까요? 무려 95세입니다. 이런 고령에도 독일은 관용은 없다며 재판을 강행했습니다. 하지만 심장병과 신장 질환 때문에 회복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의사 판정이 나오자 재판을 멈췄는데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는 죽기전까지 단죄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는 군요.

 

실제로 독일에서는 청소년기에 나치 수용소 경비병을 맡았던 90대 고령자에 대한 재판이 아직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나치 헌터’(나치 사냥꾼)로 불리는 옌스 로멜 나치범죄중앙수사국장은 매년 약 30명의 잠재적인 가해자를 발견하고 있다우리는 시간과 싸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이 죽기 전에 단죄하겠다는 각오죠. 이런 프랑스와 독일의 사례에 대해 토착왜구 조선일보나 자한당은 뭐라고 할까요? 이래도 강제징용 배상을 철회하고 일본과 화해하라고 할까요?

 

관용의 나라 프랑스에서 나치 부역자들을 용서하자는 주장이 나올 때 알베르 카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누가 감히 용서를 말할 수 있는가. 내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증오가 아니라 기억을 기초로 하는 정의다. ‘공화국 프랑스는 결코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는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도 결코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번 불매운동을 통해 토착왜구들과 일본 아베 정부에 똑똑히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는 우리를 업신여기고 도발하는 행위를 끝낼 수 있을테니까요. 이런 점에서 최근 SNS에 회자되고 있는 한글만으로 일본 뼈 때리는 북한 아나운서의 찰진 멘트가 닥일 듯한데요.

 

가증스럽게 놀아대는 간악한 쪽바리들을 가만두어서는 안 된다. 아직 정신을 덜 차리고 못되게 나오는 일본놈들에게 단단히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역사 왜곡 바로잡기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의 불매운동을 소개할까 합니다. 서 교수는 일본 불매운동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등을 부정하고 왜곡하는 APA 호텔을 지목했는데요. 이 호텔은 역사 왜곡 서적들을 객실 내 비치하고 프런트에서는 직접 판매까지 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APA호텔 최고경영자인 모토야 도시오가 이런 역사왜곡 서적들을 직접 저술했는데요. 이런 호텔을 이용한다는 것은 한국인의 수치겠죠. 아직 국내 여행사이트들이 APA호텔 숙박권을 판매하고 있던데 APA호텔 불매운동하는 멋진 사이트는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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