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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프랑스·독일이 선진국으로 거듭난 이유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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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프랑스·독일이 선진국으로 거듭난 이유는?

경불진 이피디 2019. 2. 9. 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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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위클리공감>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은 무엇일까요. 두 가지만 꼽으라면1만 년 전의 농업혁명과 약 200년 전의 산업혁명을 거론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우선 중동 지역인 메소포타미아 평야에서 시작된 농업혁명은 인간의 존재 양식을 바꾼 대단한 사건입니다. 논밭을 일구고 가축을 키운 결과 식량 생산이 무려 10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덕분에 인구도 급격히 늘어나게 됐죠. 특히 먹고 사는 문제에서 어느 정도 해방되면서 문명이라는 것을 일구게 됩니다. 물물교환을 위해 시장이 열렸고, 시장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됐습니다. 더 많은 재화를 가진 사람이 생겨나 계급이 분화하기 시작했죠. 도시와 농촌을 아우르는 국가도 본격적으로 탄생하기 시작합니다.

재미난 점은 귀족 계급이 아닌 일반 서민들의 삶은 농업혁명 이후 더 고달 퍼졌다고 합니다. 수렵 시대에는 풍족하진 못해도 하루 4~5시간 일하면 살 수 있었는데, 농사를 지으려니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뼈 빠지게 일해야 했기 때문이죠. 최첨단 과학문명 시대인데도 별보며 출근하고 달 보며 퇴근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문명이 발달한다고 모두가 행복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18세기 유럽의 산업혁명도 농업혁명만큼 인류사의 커다란 변화였습니다. 영국에서 방직기계 등을 발명하면서 생산성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하그리브스의 제니 방적기덕분에 실 생산량은 최고 300~400배나 늘었고, 옷감 짜는 기계인 직조기도 만들어졌습니다. 덕분에 종래의 수공업적 소규모 생산으로부터 대량생산의 공장제 기계공업으로 빠르게 전환됩니다. 19세기 전반의 영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며 100년 넘게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 군림했죠. 세계 다른 나라도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산업혁명을 서둘러 도입합니다. 프랑스는 1830년대에, 독일은 1850년 이후, 미국은 남북 전쟁 후에 산업혁명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산업혁명이 왜 유럽, 그중에서도 가장 변방인 영국에서 처음 일어났을까요. 바로 전세대인 중세만 해도 유럽은 암흑시기로 불렸을 만큼 모든 면에서 중국은 물론 아랍권에도 상당히 뒤졌습니다.

전 유럽이 합심해 성지를 되찾자고 펼쳐진 십자군 전쟁도 사실 서양의 일방적인 패배로 끝납니다. 11세기 말에서 13세기말까지 8차에 걸친 십자군 전쟁 중 두차례에 불과합니다. 압선 문명임을 과시하기 위해 나섰던 원정에서 오히려 아랍권의 놀라운 과학문명에 기가 죽었다는 이야기도 여러 군데에서 발견됩니다. 대수학, 광학, 화학(당시에는 연금술을 포함) 등의 지식이 서양에 전해진 것이 십자군 때문이라고 합니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도 비슷한 시기 중국의 정화원정과 비교할 경우 초라할 지경입니다. 1405년 난징을 출발해 스리랑카로 항해를 떠난 환관 정화 제독은 27000명의 선원을 태운 300척에 달하는 배를 이끌었다고 합니다. 이에 비해 1492년 카디스에서 출항했을 때 콜럼버스는 불과 세 척의 배에 90명의 선원에 불과했죠.

 

그러나 불과 300여년 만에 상황은 완전히 역전됩니다. 유럽이 역전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죽음의 병인 흑사병도 큰 기여를 했다고 합니다.

14세기에 발병한 흑사병으로 2500만에서 6000만 명에 이르는 유럽인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의 1 내지 4분의 1에 해당하는 엄청난 숫자입니다. 이처럼 인구가 감소하자 재미난 일이 벌어졌습니다. 농장에서 일할 노동력이 줄어들자 영주나 상인들은 앞다퉈 임금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무려 임금이 6배가 뛴 지역도 있다고 합니다.

검은 빵과 밀가루죽을 간신히 먹던 농민이나 노동자들이 늘어난 임금 덕분에 하얀 빵과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됐습니다. 소비가 증가하면서 경제에 활력이 돌고 덩달아 상공업도 발달하게 됩니다. “사방에 고기가 넘쳐난다. 기근에도 다들 고기를 먹고 있다는 다소 황당한 기록까지 등장합니다. 경제 발전은 르네상스 시대를 개막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경제의 미래가 밝아지자 자본가들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적극적으로 투자를 하기 시작하면서 자본주의가 서서히 태동을 준비하게 된 것도 바로 흑사병 덕분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한편 흑사병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영국에서는 오히려 영주들이 수탈 강화에 나섭니다. 흑사병으로 당시 인구의 절반이 사망하자 아예 농업을 포기하고 적은 노동력으로 가능한 양 목장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중세 유럽의 농촌에서는 대부분의 농지가 장원이나 마을의 공유지였기 때문입니다. 주민들은 오래된 관습에 따라 땅을 경작하고 가축을 방목할 권리를 나눴습니다. 한마디로 개인의 토지 소유 개념이 약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영국 영주들은 이런 점을 노려 울타리 없는 공유지를 합법 또는 불법적으로 빼앗기 시작합니다. 빼앗은 황무지와 농지에 싸잡아 울타리를 쳐서 양을 키우려 들었습니다. 특히 양모가격은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꾸준히 올랐습니다. 서늘한 기후 덕분에 양을 키우기도 유리합니다. 게다가 농사 보다 인력은 훨씬 적게 들었습니다. 이같은 현상을 경제사에서는 인클로저’(enclosure)운동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인클로저 운동이 확산되자 양모생산이 늘어나면서 모직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산업혁명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흑사병으로 인한 피해가 없었다면 영국에서 모직물 산업 발전이 상당히 늦어질 수도 있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산업혁명에 성공하면서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자본주의를 확립하게 됩니다. 흑사병 덕분에 경제가 좋아지고 산업혁명에도 성공할 수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영국이 산업혁명에 성공한 또 다른 원인으로 애국적인 해적을 꼽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하버드대 경제학·역사학 교수인 닐 퍼거슨은 제국이라는 책에서 영국을 아예 해적국가로 규정할 정도입니다.

영국이 국력을 크게 키운 시기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1558~1603) 시대입니다. 이 당시 활약했던 영웅들은 존 호킨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월터 롤리 등입니다. 영국국민들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들은 놀랍게도 모두 해적 출신입니다.

 

당시 영국은 세계의 바다를 장악하기 위해 당대 최강인 스페인을 눌러 이겨야 했습니다. 당시 스페인은 중남미 대륙의 거의 대부분과 플로리다를 비롯한 북아메리카의 많은 부분을 소유하고 있었고 아시아에도 필리핀이라는 식민 거점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국왕 펠리페 2(1558~1598)가 영국보다 먼저 내 영토에는 결코 해가 지지 않는다고 자부했을 정도 입니다.

이같은 스페인을 정공법으로 꺾기는 힘들다고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판단합니다. 이에따라 해적들에게 약탈허가증(Letter of Marque)을 발행해 해적 행위를 공식화했습니다.

 

존 호킨스는 국왕의 호의를 입어 해적사업으로 성공한 초기 사례 중 하나입니다. 그는 15644척의 배를 이끌고 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를 공격해 엄청난 금은보화를 약탈했습니다. 드레이크는 호킨스의 조카입니다. 삼촌에게 배운 실력으로 1572년 아메리카의 광산에서 캐낸 금은을 선적하는 중심지인 놈브레 데 디오스 항구를 공격해 100만파운드에 달하는 금··진주를 수중에 넣었습니다. 이후 드레이크는 태평양에서 카카푸에고호를 나포해 26t의 은, 8만파운드의 금, 20만파운드의 보석도 약탈합니다. 특히 드레이크는 이처럼 충실히해적질을 한 덕분에 역사상 두 번째로 지구 일주 항해를 마친 인물이기도 합니다.

 

영국 해적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은 스페인은 지속적으로 항의를 합니다. 그러난 엘리자베스 여완은 정부 정책에 반하는 해적의 소행이라고 매번 핑계를 댔죠. 그러면서 스스로 투자해 막대한 이득을 챙겨준 드레이크에게는 배에 직접 올라 기사 작위를 수여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화가 난 스페인은 무적함대를 이끌고 1588년 영국을 침공했죠. 하지만 열흘간의 치열한 해전 끝에 스페인은 참패를 했습니다. 이때도 영국 해군복을 입은 해적들이 큰 활약을 했는데 특히 드레이크 등이 고안한 화공전이 무적함대를 물리치는데 큰 공헌을 했다고 합니다.

 

그럼 영국 해적들이 챙긴 부는 얼마나 됐을까요.

미국 경제주간지 포브스가 역사자료와 공식기록, 1718세기에 활동한 역사가와 작가들의 글 등을 토대로 역대 해적 선장(두목)들의 노략품을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한 결과, 18세기 초 악명을 떨친 블랙샘새뮤얼 벨러이(16891717)12000만달러(1350억여원)1위를 차지했습니다. 영국 출신인 벨러이는 171724.5t의 금이 실린 노예선 위다호를 나포한 것으로 악명 높습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15431596)11500만달러(1300억여원)2위에 올랐습니다.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 해적계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영국인 토마스 튜는 1693년 인도에서 오토만 제국으로 가던 금 수송선을 약탈하는 등 1200만달러(1160억여원)어치의 노략품을 챙겨 3위에 올랐습니다.

이 밖에 홍해, 인도양 등에서 해적질을 일삼은 존 보언(?1704)4000만달러(450억여원)4, 3년 만에 400여척의 상선을 나포해 악명높은 영국 출신의 블랙바트(검은 남작)’ 바솔로뮤 로버츠(16821722)3200만달러(360억여원)5, 영국 출신으로 해적의 대명사 격인 블랙비어드(검은 수염)’ 에드워드 티치(16801718)1250만달러(140억여원)10위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들 해적 선장들은 술집과 매춘에 돈을 흥청망청 쓴 데다 붙잡혀 처형되면서 몰수당해 아무런 영예도 부도 남기지 못했다고 하네요.

 

이같은 약탈을 일삼는 해적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영국을 신사의 나라로 계속 불러도 될지도 의심스럽습니다. 하지만 해적에 대한 다른 평가도 있습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즐겨 입었던 티셔츠 중에는 해적이 되자’(Let’s be pirates!)라고 쓰여진 것이 유명합니다. 잡스는 애플의 혁신적 창의성이 시키는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해군이 아니라 게릴라 정신을 가진 반항적인 해적들로부터 나왔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해군이 되느니 해적이 되는 게 낫다고 주장하기도 했죠. 이 때문에 경제·경영분야에서 해적은 혁신의 아이콘으로도 쓰이고 있습니다


가자 조국의 아들들아/ 영광이 날이 왔다!/ 압제에 맞서 피묻은 깃발을 들었다/ 들판에서도 들리는가/ 저 포악한 병사들의 외침이/ 그들이 여기까지 닥쳐와 당신의 자식과 아내를 죽이려 한다/ 무장하라, 시민들이여/ 무리를 지어라/ 행진하자, 행진하자!/ 불순한 피가/ 우리의 밭을 적실 때까지!’

프랑스의 주요 행사나 월드컵 등 국제경기에서 빠짐없이 들리는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의 가사입니다. 자유와 평등의 나라 프랑스에서 이같이 살벌한 가사를 담은 국가를 부르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라 마르세예즈의 작사·작곡자는 공병장교 루제 드 릴입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에 성공한 프랑스 시민군이 17924월 프랑스가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스트라스부르의 숙소에서 하룻밤 사이에 가사와 멜로디를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라인강변으로 출정하는 용사들의 심경을 담은 절규에 가까운 노래이지만 밝은 선율 덕분에 프랑스 도처에서 불리게 됩니다. 그러나 혁명이 제압당한 후 집권한 나폴레옹 이후로는 부르지 못하고 부르봉 왕정복고 시기 때는 전면 금지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시민들이 권력을 되찾은 제3공화국 시절 1879년에 정식 국가로서 채택됩니다.

 

자유·평등·박애를 상징하는 프랑스 국기의 유래도 프랑스 혁명에 있습니다. 시민군 총사령관 라파예트는 바스티유 감옥 습격 후, 시민들에게 삼색 모자를 나눠줬다고 합니다. 현재의 프랑스 국기인 삼색기가 여기서 시작했죠.

 

프랑스 혁명은 경제적으로 큰 영향을 끼칩니다. 대표적인 것이 단위의 개혁입니다. 당시 프랑스에는 지역별, 업종별로 너무 많은 단위가 혼란스럽게 쓰이고 있었다고 합니다. 무려 사용된 단위가 약 25만개에 달했고 하네요. 이같은 단위의 혼용은 권력층인 영주들이 세금을 자의적으로 거둬들이는 수단이 됐습니다.

 

이런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혁명 후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단위의 필요성이 제기됐습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척도 기준을 세상의 크기로부터 구하겠다는 발상은 당시 자유와 평등으로 대변되는 혁명 정신과도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논의를 거친 끝에 길이의 단위를 지구 둘레를 바탕으로 정의하자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의 천문학자 들랑브르와 메생이 파리를 지나는 지구 자오선 측정 원정대를 구성해 프랑스 남북부에서 스페인까지의 거리를 직접 지나가며 측량했습니다.

무려 6년 넘는 고생 끝에 두 과학자가 측정한 자료를 바탕으로 북극에서 적도까지의 거리를 1000만분의 1로 줄인 1m 원기를 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탄생한 미터의 정의는 추후 질량 등 다양한 단위의 기초가 됐습니다.

 



커피 덕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는 재미난 주장도 있습니다. 커피는 에티오피아의 목동 칼디에 의해 처음 발견된 이후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중세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초기에는 커피를 이교도의 음료라고 배척하던 유럽인들은 이내 커피에 빠져 들기 시작했죠. 특히 커피를 마시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자 살롱문화가 발전하게 됩니다. 살롱에서는 당대의 지식인들이 모여 철학과 문학을 논하며 지식을 교환하고 다듬었습니다. 특히 1686년 프랑스 파리에 처음 생긴 프로코프(Procope) 카페는 혁명적 사상을 탄생시킨 역사의 진원지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프랑스 지식인들은 학문과 정치를 논하기 위해 이 카페를 찾았고, 프로코프를 시작으로 줄줄이 생겨난 주변 카페들은 프랑스 혁명의 씨앗으로 불릴 만큼 원동력이 됐다고 합니다.

 

프랑스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외인부대입니다. ‘레종 에트랑제라고 하는 외인부대는 1831년 당시 프랑스 국왕 루이 필립 1세가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5개 대대 규모의 용병을 창설한 것이 효시입니다.

이후 1862년 나폴레옹 3세 때 멕시코전쟁을 시작으로 인도차이나 ·마다가스카르 ·모로코 등지의 프랑스 식민지에서 주로 활동했습니다. 프랑스 외인부대가 35000회 이상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러왔다고 합니다. 특히 용기를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목숨을 버리겠다는 부대 정신을 구축됐다고 하네요.

 

프랑스 외인부대가 큰 명성을 얻는 것은 2차대전 덕분입니다.

2차대전 직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나치가 정권을 잡자 이에 반대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군·경찰이 외인부대에 많이 입대했습니다. 그 덕분에 2차대전 직전 프랑스 외인부대는 병사는 절반이 독일 오스트리아 출신이고 부사관은 3분의 2가 독일과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합군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출신 장병들이 막상 전쟁이 일어나면 부대를 배반하고 독일군 편에 붙을까 걱정을 해서 정보기관을 이용해 이들에 대한 감시를 철저히 했었죠.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자 이들은 다른 연합군들보다 훨씬 더 용감하게 싸워 독일군을 크게 무찔렀고 독일군의 롬멜 원수도 그들의 능력을 크게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외인부대는 침략전쟁에도 이용당합니다. 2차 세계대전 후인 19461954년 인도차이나에서 명분 없는 침략전쟁을 벌였는데 오합지졸인 베트남 독립군 쯤에 무려 1만명이나 전사하는 큰 패배를 당하기도 합니다.

현재 외인부대는 국적에 상관없이 만 1740세의 남자를 대상으로 신체검사 등 일련의 테스트를 거쳐 선발합니다. 어학능력 개인신상 등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선발 및 훈련과정이 혹독해 지원자의 90%가 탈락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대하면 프랑스국적과 함께 프랑스내 각종 공공요금의 70% 할인혜택이 주어집니다.

이 덕분에 현재 프랑스 외인부대는 전세계 138개국 출신 8500여명으로 구성돼 있으며 한국인도 수십여명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장동건이 출현했던 영화 마이웨이도 한국인 출신 프랑스 외인부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독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 중의 하나가 비스마르크입니다. 1866년 오스트리아 전쟁, 1870년 보불전쟁을 승리로 이끈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통일을 이룩하고 독일제국의 초대 총리로 취임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총리 시절에 현재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이 아니라 철과 피에 의해 결정된다는 정책을 밀어붙여 철혈 재상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비스마르크의 독일에서 현대식 사회보장보험제도가 처음으로 만들어졌다면 믿을 수 있을까요. 비스마르크는 철혈재상이라는 별명답게 국가의 물리적 통일에는 무기와 병사를 동원했지만, 국민의 마음을 얻는 정신적 통일 작업에는 평화적이고 따뜻한 정책을 선보입니다.

1883년에 질병보험, 1884년에 화재보험이 대표적입니다. 통일 후 중공업을 중심으로 자본주의가 급성장하고 노동자 수도 늘어났지만 아직도 불안해하는 국민들을 위해 든든한 버팀목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특히 비스마르크는 통일이 완성된 후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군인들이 군에 남으려 하는 이유에 대해 궁금했습니다. 알고 보니 군복을 벗고 돌아가 봐야 먹고살 길이 막막했기 때문이었죠. 비스마르크는 퇴역하면 연금을 주겠다는 선언합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세계 최초의 공적인금인 노령폐질연금입니다. 1889년에 도입된 노령폐질연금은 국가의 관리나 도제를 제외한 연간소득 2000마르크 미만인 모든 노동자가 강제 가입대상이었습니다. 70세에 달한 노동자들에겐 노령연금을, 자신의 과오가 아닌 사유로 노동이 불가능한 노동자에겐 폐질연금을 지급했습니다.

 

통일 과정에서 철혈적모습을 보이면서 사회주의자를 공공의 적으로 여기던 우파 정치인인 비스마르크가 노동자의 사회적 보호막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보험을 세계 최초로 도입한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일각에서는 당시 독일 남성 노동자의 평균 수명이 45살에 불과해 70살부터 받을 수 있는 노령연금은 빛 좋은 개살구였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비스마르크는 사회보험으로 영토는 물론 국민들의 마음도 통일을 이룹니다. 이를 바탕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키우죠. 물론 세계 제1·2차 대전이 벌어진 원인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밀리터리 마니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라도 독일입니다. 1·2차 대전 동안 독일은 다양하고 혁신적인 무기들을 개발해 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세계 최초의 제트기인 하인켈 He178입니다. 독일 하인켈사가 1939년에 만든 이 비행기는 제트엔진을 실험하기 위해 개발된 유인 실험용 기체였습니다. 시속 598km로 비행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개발된 메서슈미트 Me262’는 세계 최초로 실전에 배치된 전투기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메서슈미트262기는 고도 6000m 에서 시속 870km로 비행할 수 있어 다른 항공기보다 시속 150km 이상이나 빨랐습니다. 덕분에 2차 대전 초기에는 연합군 폭격기 편대를 간단히 추월해 격추시켰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Me262전투기의 놀라운 성능을 조정할 숙련된 조종사가 갈수록 줄어들면서 위력도 덩달아 줄어들었습니다. 2차대전 이후 Me-262는 미국과 소련이 접수해 제트 전투기의 개발에 반영됐습니다.

 


<영화 퓨리 속 티거 탱크>


독일판 가미가제인 미스텔도 있다고 합니다. 유인 전투기에 폭탄을 실은 일본과는 달리 독일은 조종사들의 희생을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폭약을 실은 폭격기를 조정해 목표지점에 도달하면 위에 실린 전투기로 이동에 탈출하는 방식입니다.

 

히틀러가 자랑했던 티거 탱크도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전면 장갑이 100mm에 달해 당시 미군 주력인 M4 셔먼의 75미리 주로는 명중해 봐야 모두 튕겨나가는 수준이었습니다. 반면 티거가 탑재한 88미리 포는 거의 2킬로미터 밖에 있는 M4 셔먼을 포함한 연합군 전차들을 안전하게 격파 할 수 있었죠. 이 때문에 1943년에 처음 전장에 등장한 티거탱크는 연합군 병사들 사이에서 일명 티거 전차 공포증을 유발하게 됩니다. 티거의 위력은 영화 퓨리를 보면 실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티거탱크의 자기 큰 적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기존의 주력 전차보다 2배에 달하는 제작비용으로 많은 수를 만들어 내지 못했습니다. 또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한 두터운 장갑 때문에 중량이 무려 57톤에 달해 고장 나는 부품들도 많았습니다. 문제는 자기 한 몸도 너무 무거운 형국이라 고장 난 티거 전차를 견인하는 것은 꿈도 못 꾸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독일군은 고장 난 티거 전차를 수습하지 못하고 버리거나 혹은 폭파시키고 후퇴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밖에 세계 최초의 순항미사일 V1과 세계 최초의 탄도미사일 V2, 영국해협 건너 영국 본토를 겨냥할 수 있는 150m 길이 포신의 해협 횡단 대포도 연합군을 공포에 몰아넣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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