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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뒷이야기

한국이 일본을 깔보는 진짜 이유는?

경불진 이피디 2019. 2. 8.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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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은 라이벌이라는 단어로는 도저히 설명하기 힘든 관계죠

특히 일본에 지는 것을 죽은 것보다도 못 참는 한국인들도 많죠. 축구나 야구 등 스포츠 경기에서는 이같은 현상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한국에 오랜 산 외국인들 중에는 일본이 이유없이 밉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죠. 일본도 마찬가지죠. 스마트폰·가전 등에서 소니·파나소닉 등이 삼성에 밀리자 일본의 자존심이 무너졌다고 분개하는 일본인들이 많습니다. 미국·독일이 아닌 한국에 뒤진 것이 분하다는 이야기죠.



그런데 양국민들의 이런 마음속에는 상대방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는 속내가 깔려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일본인들을 대놓고 무시하기 일쑤고 일본사람들도 한국인들을 깔보기 십상이죠.


그런데 이런 생각을 드는 사람도 있을 듯합니다. ‘일본은 한때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었는데 우리가 이렇게 대놓고 무시해도 되는 걸까라는 생각 말이죠. 실제로 현재 국력을 비교해보면 국토면적, 인구, 경제력 등 모든 면에서 한국이 일본에 뒤집니다.


국토면적(CIA The World Factbook 기준. 2014)에서 일본이 3.4배나 큽니다. 한국은 99,720로 세계 109위인데 반해 일본은 377,915로 세계 62위입니다. 남북한 전체 면적도 198,500로 일본의 절반 수준에 불과합니다. 인구도 일본이 2.4배 많습니다. 한국은 약 5140만명로 세계 26, 일본은 약 12710만명으로 세계 10위입니다. 경제력을 나타내는 GDP(IMF 기준. 2015)의 경우도 3배 정도 차이나는 군요. 한국은 14,351억달러로 세계 11, 일본은 42,104억달러로 세계 3위입니다. 현시점에서 비교하면 한국과 일본의 국력은 약 3배 가까이 차이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에도 그랬을까요. 일단 GDP는 자료가 없으니 영토면적과 인구수로 국력을 추정해보겠습니다. 우선 삼국시대 고구려만 보더라도 전성기인 장수왕 때 국경이 북으로는 지금 중국의 농안에서 송화강 유역에 있는 길림과 장춘을 잇는 선까지 올라갑니다. 동쪽으로는 지금의 두만강 하류에서 훈춘 지역 일대, 서쪽으로는 요하, 남쪽으로는 남양만에서 죽령일대를 거쳐 동해안의 울진·영덕 지역을 잇는 선입니다. 따라서 한반도 면적의 2.7배 정도 크기죠. 현재 한국 면적보다는 6배나 넓은 대략 66에 달합니다. 일본의 야마토 정권은 일본 열도 전체를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면적은 고구려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전 시기인 고조선이나 이후인 발해까지도 고구려 보다 영토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감히 일본이 넘보지 못할 수준이었겠죠.



 

인구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구당서에는 고구려의 176개성에 697000호가 있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1호당 6~8명이라고 가정하면 대략 500만 명 정도의 인구를 거느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일본은 5세기까지 200만 명을 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국력을 나타내는 인구수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셈이죠.

고조선부터 삼국시대를 거쳐 발해시대까지 약 2000년 이상이 우리 민족이 일본을 훨씬 앞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와 일본의 영토가 역전된 것은 발해가 멸망한 한 926년 이후부터죠. 특히 인류학 권위자인 일본 국립 민속학박물관의 고야마슈조 교수에 따르면 일본의 인구는 7세기 갑자기 늘어나 약 500~600만명에 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백제와 고구려 유민이 대거 일본으로 유입됐다는 명백한 증거죠.

 



이후로는 일본이 인구나 영토면에서 우리나라를 앞서고 있죠. CIA역사 보고서를 살펴보면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6세기 일본의 인구는 약 2200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현재 북한 인구와 비슷한 수준이니 생각보다 많은 숫자죠. 당시 조선의 인구는 일본의 절반에도 훨씬 못미치는 약 900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명나라의 인구는 약 21000만 명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인구 격차는 갈수록 벌어집니다. 1차 대전이 발발했던 1910년대에는 일본이 약 7000만인데 반해 조선은 약 1200만 명 밖에 안됩니다. 무려 6배나 차이나는 군요. 당시 청나라는 약 4억 명이라고 하는 군요. 해방당시에는 일본은 약 1억 명인데 반해 남·북한 합친 인구는 3000만 명에 불과합니다. 중국은 이미 10억 명을 돌파했다고 하네요.

 

이처럼 고려시대 이후 인구에서 일방적으로 일본과 중국에 밀리면서도 우리나라가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요. 일본은 물론 1000년 가까이 최고 문명국으로 굴림 했던 중국마저 앞섰던 과학기술에 있다는 분석이 많습니다.

 


첨성대, 측우기, 금속활자 등을 우리민족이 가장 먼저 발명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발명품이 국력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우선 신라시대 27대 선덕여왕 때 만들어진 첨성대는 당시 농업과 어업 생산량 증대에 큰 기여를 합니다. 24절기와 밀물과 썰물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이렇게 늘어난 농업·어업 생산량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할 수 있었던 밑천이 됩니다. 신라만 천문학에 뛰어났던 것은 아닙니다. 과천국립과학관 전통과학관에 가면 비석에 새겨진 거대한 천문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국보 제228호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이 그 주인공이죠. 이이 비석은 조선조 태조 4(1395)에 고구려 시대 평양에서 각석한 천문도(‘평양 성도(星圖)’) 비석의 탁본을 바탕으로 돌에 새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전천(全天) 천문도 가운데 하나입니다.

조선 세종 때 만들어져 14425월부터 실제 측량을 했던 측우기도 조선 초기 경제 발달에 큰 역할했습니다. 특히 측우기는 유럽보다 200년 빠른 것으로 알려져 있죠. 유럽에서는 1639년 로마에서 이탈리아의 B.가스텔리가 처음으로 측우기로 강우량을 관측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금속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은 직지심체요절(1377)이고, 금속활자는 독일 구텐베르크의 성경활자(1455)랍니다. 구텐베르크의 활자가 산업혁명에 큰 영향을 끼쳤듯이 직지도 당시 고려가 몽골 침략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줬습니다. 고려는 이보다 100년이나 앞선 1239년에 증도가자(證道歌字)’를 발명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증도가자는 고려시대 선불교 해설서인 남명화상찬송증도가의 목판본(1239)을 찍기 전에 간행된 주자본(금속활자본)을 인쇄하는 데 쓰인 활자로 알려진 증도가자(證道歌字)’.


<영화: 신기전>

 

이뿐만 아닙니다. 우리민족이 적은 숫자로 중국과 일본의 침입을 막아낸 것은 뛰어난 무기기술에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세계 최초 철갑선인 거북선 말고도 우리민족이 처음 발명한 무기가 또 있습니다. 영화로도 제작돼 화제를 모았던 신기전이 그 주인공입니다.

신기전은 100250m를 날아가는 소·중신기전과 600m를 날아가는 대신기전과 산화신기전 등 다양하게 만들어졌습니다. 특히 산화신기전은 세계 최초의 2단 로켓입니다. 길이가 무려 5.4m로 최대 1km 밖에 있는 적의 성벽이나 배를 한방에 박살낼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화 신기전에서 신기전으로 명나라 군대를 물리친 설주와 홍리에게 세종대왕이 절을 하며 적국의 일개 사신에게도 4()를 하거늘 하물며 우리나라의 백성에게 절을 하는 것이 어찌 허물이 된단 말이더냐. 짐은 왕이요 백성들은 황제이니라라고 기뻐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보다 앞선 고려말 우왕 3(1377) 화약을 발명한 최무선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당시 세계에서 화약을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오로지 중국밖에 없었습니다. 중국인들이 화약 제조방법을 극비에 부쳐 절대로 나라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감시했기 때문이죠. 따라서 최무선의 발명 덕분에 고려는 당시 제2의 화약보유국이었습니다. 특히 중국은 화약을 축제 등에만 사용했던데 반해 고려는 무기로 활용합니다. 최무선은 로켓 화살무기인 주화도 만들었습니다. ‘달리는 불이라는 뜻을 가진 주화는 길이가 1015, 직경이 23인 종이통을 약통으로 사용했으며 120길이의 화살을 날려 보낼 수 있었습니다. 최영 장군의 홍산대첩, 이성계 장군의 황산대첩, 정지 장군의 남해도전투와 더불어 고려 말기 왜구를 토벌한 4대 승전의 하나인 진포해전(우왕 재위 6·서기 1380)에 최무선은 주화를 실전에 배치했습니다. 세계 최초의 함포전도 우리민족이 한 셈입니다.

 

세계 최초의 수류탄·시한폭탄도 우리 손으로 만들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이장손이 발명한 비격진천뢰가 주인공입니다. 축구공만 한 크기의 포탄에 날카로운 쇠조각 수백개를 넣어 왜구를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얼마전 끝난 징비록에도 비격진천뢰가 만들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 민족은 적은 인원으로도 중국과 일본을 물리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이렇게 뛰어난 과학무기 기술에 있었습니다.


 

그럼 방어력에 특화된 일본에는 무슨 비결이 숨어있을까요. 섬나라인 일본은 현재까지 외적의 침입을 받은 경우가 한번 밖에 없습니다. 바다가 천혜의 방패가 돼준 덕분이죠. 고려시대인 1274년 여몽연합군이 전선 900여척에 3만여명의 병력으로 일본 본토에 상륙해 공격했던 것이 유일합니다. 이 당시 현재 후쿠오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은 무참하게 패하지만 난데없는 태풍 때문에 여몽연합군의 전선 200여척이 수장되죠. 이후 12812차 원정에서는 전선 4000여척에 14만 대군으로 휘몰아쳤지만 또다시 태풍 때문에 10만명 이상이 수장됐다고 합니다. 이후 일본은 여몽연합군을 물리쳐준 태풍을 신풍, 즉 카미가제라 부르며 숭상하게 되죠. 2차대전 당시 연합군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자살공격도 카미가제가 일본을 또다시 지켜줄 것이라는 그릇된 믿음 때문이라고 합니다. 도미네이션즈에서 일본의 방어력이 강한 이유가 이해됩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우리민족에 비해 문화적으로 매우 뒤진 것으로 보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일본 사극을 보면 승녀들이 쓰고 있는 모자입니다. 임진왜란에서 왜군에 큰 승리를 한 사명대사는 일본 승려에게 자신의 버선을 벗어 머리에 씌워줬다고 합니다. 조선의 발 아래 존재란 뜻에서죠. 오늘날 일본 승려들의 모자가 한국 버선처럼 생긴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명 대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일본 남정네들을 거세해 말린 불알 몇 가마니를 바칠 것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남자의 가 부족해진 일본 여성들은 허리에 담요를 차고 다니며 씨앗 받기에 매진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기모노의 기원이라고 합니다.

 


이러던 일본이 19세기 위로부터 개혁인 메이지 유신의 성공으로 빠르게 구미 열강을 따라 잡습니다. 학제, 징병령, 조세개편 등을 하며 부국강병의 기치 하에 근대국가의 모습은 갖췄으나 이 과정에서 서구식 민주화와 인권의 가치는 도외시하고 일본왕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적 모험주의를 강화해 군국주의로 가는 과정을 거쳤죠. 일본은 이후 청나라,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더니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승전국에 이름을 올립니다. 중국에 있던 독일 조차지를 비롯해 남태평양 상의 독일령 섬들을 점령한 덕분이죠.

 

그러나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해 쫄딱 망했을 때 한국에서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기사회생합니다. 일본 카미가제 공격에 호되게 당했던 미국은 일본을 농사중심국가로 개발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6·25가 터지자 마저 미국은 한반도와 가까운 일본에 대규모 군수공장을 짓게 되죠. 이 덕분에 일본은 빠르게 경제성장을 하면서 한때 세계 2위 경제대국에 올라서게 됩니다. 일부 학자들은 만일 6·25가 터지지 않았다면 일본은 소련이 해체되기 전까진 농사나 지으면서 관광수익이나 올리고 있을 것이라고 주장할 정도입니다.

고구려·백제가 망하지 않았다면 6·25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오늘날 일본이 있을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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