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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의 진실

투표가 밥 먹여준다 '정치적 경기순환'

경불진 이피디 2019. 7. 24.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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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가 밥먹여 주냐?”

투표 하나로 무슨 세상이 바뀌냐?”

 

선거제도 자체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정치적 경기순환(political business cycle)이란 용어가 있습니다. 정치적 동기에 의해 거시지표상의 변화가 나타나는 현상을 뜻하는 말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선거전에는 선심용 각종 경기부양책이 나오는 반면 선거직후부터 통화팽창, 인플레를 수습하기 위한 강력한 긴축정책이 시작된다는 이야기죠. 정치의 영향력이 강한 미국에서 탄생한 용어입니다.

 

정치 일정에 따라 경기가 진짜 순환할까요. 이미 여러 연구를 통해 정치적 경기순환 현상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 증명됐습니다. 미국을 포함해 많은 국가들에서 선거 직전 소득 증가 등 경제상황이 개선되고 소득이전정책 등 각종 재정수단의 사용이 늘었으며, 선거 직후 물가상승률이 높아지는 등 경제 환경의 변화가 관찰된 것이죠.

 

미국의 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미국의 정치는 공화당과 민주당이라는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양당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딱 잘라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하지만 대체로 미국의 고소득층은 보수적이며 상대적으로 낮은 물가인상률을 선호하는 반면 저소득층은 진보적이며 상대적으로 낮은 실업률을 선호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물가와 실업률은 일반적으로 반비례하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은 선택하고 반대의 것은 포기하는 셈입니다. 고소득층이 공화당을, 저소득층이 민주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뚜렷한 것도 이 때문이죠.

 

그런데 정치적 경기순환에 따라 미국 경제의 거시지표는 춤을 췄습니다. 백악관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경제지표도 달라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정치적 경기순환 연구에 따르면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집권 후 20세기 후반기 4년마다 돌아오는 대선 연도의 미국 실업률은 일곱 번의 공화당 대통령 임기 하에서 전년 대비 평균 1%포인트 상승했습니다. 그러나 물가상승률은 평균 1.4%포인트 감소했습니다. 반면에 다섯 번의 민주당 대통령 임기 하에서 대선 연도의 미국 실업률은 전년 대비 평균 1.2%포인트 감소했으나 물가상승률은 평균 2.2%포인트 상승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공화당 출신인 리처드 닉슨 대통령 재임을 전후한 시기입니다. 닉슨은 첫 임기(1969~1972)의 후반기에 급격한 통화·재정 확장정책으로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정책을 썼습니다. 물론 재선을 노린 조치였죠. 닉슨은 집권 초반 긴축적인 통화·재정정책을 시행했다가 실업률 상승 등으로 정치적 압박이 심해지자 자신과 친분이 오랜 아서 F. 번즈를 1970년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 Fed)의 의장으로 임명했습니다. 연준은 그의 기대대로 1972년까지 확장적 통화정책을 계속했습니다. 돈이 대거 풀려 나가고 재정 지출이 크게 늘어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습니다. 결국 닉슨 미국 정치사의 최대 스캔들로 꼽히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하게 됩니다.

 

이는 장기적 성장 동력의 훼손, 과다한 미래비용 등 사회비용을 초래하더라도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거시경제정책이 운영됐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거시경제정책이 이용된 셈이죠.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조세연구원의 정치적 경기·예산 순환 발생 사례 분석이라는 보고서는 민주화 항쟁에 힘입어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된 1987년의 13대 대선에서 200717대 대선까지 모두 다섯 차례의 대선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5차례 대선에서 선거 이전에는 실업률이 하락하고 물가도 안정세를 보였지만 일단 선거가 끝나고 나면 실업률과 물가가 상승하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동산, 사회간접자본(SOC) 시설, 금융정책 관련 지표는 정치적 경기순환과 일치하는 현상이 뚜렷했죠. 특히 이같은 현상은 전두환 대통령의 후계자로 지명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된 13대 대선이 가장 뚜렷했습니다. 독재자가 정권 말기에 자신의 지명자를 후보에 당선시키려는 목적으로 막대한 재정을 풀어 경기를 호전시킨 정황이 고스란히 읽히는 대목입니다. 정치적 경기순환과 재정정책의 상관관계는 13대 대선에 이어 15, 14, 17대 순으로 높았고 16대가 제일 낮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탄생시킨 16대 대선은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치러졌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어느 정당이 미래를 희생시켰는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유권자가 근시안적 존재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유권자들을 우습게 본 것입니다.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적 공약을 남발해야 유권자들이 뽑아줄 것이란 생각도 바탕에 깔려있습니다. 특히 비현실적인 공약으로 유권자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줘 투표율을 낮추려는 불순한 의도도 숨겨져 있습니다.

 

OECD2011년 내놓은 보고서를 보면 더욱 심각합니다. 2011년 기준으로 OECD 평균 투표율은 70%였습니다. 의무 투표제를 실시하고 있는 호주가 95%로 가장 높았고 룩셈부르크(92%), 벨기에(91%), 칠레(88%), 덴마크(87%), 독일(78%), 일본(67%) 등이 뒤를 이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의 투표율(2008년 총선)46.3%에 불과합니다. 19대 때 54.4%로 반등했지만 전 세계 평균에는 훨씬 못 미치는 수치입니다. 재미난 것은 칠레를 제외하고는 선진국들이 훨씬 투표율이 높다는 점입니다. 선진국일수록 정치에 관심없어 투표율도 낮을 것이라는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허무는 결과입니다.

 

특히 심각한 것은 55세 이상(장년층)35세 이하(청년층) 유권자들 간 투표율 격차입니다. OECD의 평균 장년층과 청년층의 투표율 차이는 약 12.1%포인트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격차는 무려 22.8%포인트입니다. 전 세계 평균의 두배에 가까운 셈이죠.

 

국내 정치권에서 젊은 세대를 위해 립서비스 외에 별다른 공약을 내놓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투표가 밥먹여 주지 못하고 투표 하나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OECD 보고서에서도 증명되듯이 선진국이 되려면 투표율이 더욱 높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유권자들을 우습게 보는 정치적 경기순환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투표를 하지 않으면 밥을 먹지 못할 수도 있고 세상도 영원히 바뀌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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