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불진 이피디의 경제공부방
이창용 한은 총재가 입시제도 개편을 주장한 이유는? 본문
“(‘지역별 비례선발제’를 도입하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교수님들의 결단으로 변화가 시작돼 대치동 학원들이 전국으로 분산되고, 지방의 중고등 학생이 입시를 위해 서울로 이주해올 필요가 없어지고, 매년 학기 초가 되면 각 지역 고등학교의 입학환영회 플래카드가 대학 정문에 걸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
누가 한 말일까요? 놀랍게도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한 발언입니다. 기준금리를 정하는 통화정책 세우기에도 바쁜 이총재가 어제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경제전문가가 왜 교육정책을 논했을까요? 또 이 총재의 발언이 실효성은 있을까요?
이 총재는 교육정책에 대해 언급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수도권 부동산 가격과 같은 구조적 문제들이 지난 수십년간 누증되면서 이제는 통화정책을 제약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특히 교육열에서 파생된 끝없는 수요가 금리인하를 망설여야 할 만큼 강남 부동산 불패의 신화를 고착시켰다.”
이 발언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 것입니다. ‘학군이 집값을 만든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교육과 부동산은 매우 밀접하죠. 특히 지난해 유독 어려웠던 ‘불수능’이 사회문제화되면서 소위 학군 좋은 ‘학군지’ 집값과 전세값이 뜀박질했잖아요.
게다가 계층간 교육비 격차도 갈수록 벌어지고 있죠. 고교생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의 경우 월소득 800만원 이상인 고소득층이 월소득 200만원 미만의 저소득층에 비해 지출 수준이 2.6배에 달할 정도입니다. 소득수준과 거주지역에 따른 사교육비의 격차가 상위권대 진학률 차이로 나타나고 있고요, 이런 상황을 그대로 둬서는 서울로만 몰리는 심리를 막을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집값을 잡으려면 금리 조정보다 입시 제도 개편이 필요하다는 거죠.
이 총재는 “교육 측면에서 우리 사회는 '나쁜 균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이런 나쁜 균형에서 빠져나오려면 파격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파격적인 해결책이 바로 ‘지역별 비례선발제’.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걸까요?
상위권 대학들이 대부분의 입학 정원을 지역별 학령인구 비율을 반영해 선발하자는 겁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성적순으로 학생을 뽑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지역별로 정원을 할당해두자는 말이죠.
서울대 지역균형전형이나 기회균형특별전형 등 지금도 비슷한 제도가 시행되고 있죠. 하지만 이번 제안의 가장 큰 차이점은 더 많은 인원을, 입학 정원의 대부분을 지역 선발 인원으로 채우자는데 있습니다.
구체적인 방법은 뭘까요?
예를 들어 전체 합격자 가운데 특정 지역 출신의 비율을 전국 고3 학생 중 해당 지역 학생 비율과 일치시키자는 것입니다. 다만 두 비율을 현실적으로 정확히 일치시키기 어려운 점을 감안해 각 지역의 선발 인원에 상한과 하한을 설정하는 유연한 방식을 고려할 수 있다고 한은은 밝혔습니다.
이렇게 뽑힌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해 대등한 경쟁을 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한은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부모의 경제력이나 거주 지역에서 불리한 지역의 인재들이 현재의 입시제도에서는 비슷한 잠재력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도 상대적으로 상위권 대학에 진학할 확률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실제로 한은은 부모 소득이 상위 20%인 학생을 소득 상위그룹, 나머지 학생을 소득 하위그룹(소득하위 80%)로 나눠 두 그룹의 학생 잠재력 분포를 비교했습니다. 구체적인 비교 방법은 좀 복잡하니 결론만 살펴보면 상위권대 진학률 격차 중 약 25%만이 학생의 잠재력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나머지 75%는 부모 경제력 효과라는 거죠. 즉 소위 명문대 다니 학생들은 자신이 열심히 공부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부모를 잘 만난 덕이 더 크다는 겁니다.
이건 누가봐도 공평하지 못한 것이죠. 따라서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지역별 비례선발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지역별 비례선발제와 비슷한 서울대 지역균형전형과 기회균형특별전형으로 입학한 학생들의 성적(학점)을 보면 놀랍다는데요. 소위 강남 출신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오히려 정시 일반전형으로 많이 입학하는 강남 3구 출신 학생보다도 우수한 성적을 보였다는 거죠. 따라서 성적에 대한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불공정은 개선할 수 있고요.
실제로 한은이 지역별 비례선발제를 시행할 경우를 가정한 시나리오에서 분석한 결과 이 제도를 대부분의 입학 정원에 적용하면 서울대 진학률이 학생의 잠재력에 가깝게 조정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하한과 상한의 범위를 좁힐수록 각 지역의 서울대 진학률은 잠재력 기준 진학률에 가까워졌습니다.
이 총재는 “이 제안은 정부 정책이나 법 제도를 손대지 않더라도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교수님들이 결단만 해주신다면 큰 파급효과를 일으키고 나쁜 균형에서 벗어나는 단초를 제공하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며 “모든 지역에 적용하지 않고 서울에만 적용해도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여기에 경제적 효과도 빼놓을 수 없죠. 지역별로 선발 인원이 정해지면 초중등학생부터 서울로 올라와 입시 경쟁을 하려는 수요가 현저히 줄 수 있습니다. 이 제도를 이용하기 위해 오히려 지역으로 내려가는 수요가 생길 수도 있고요. 따라서 지역경제도 활성화되고 국토균형발전에도 도움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부동산 문제도 해결될 수 있고요.
애청자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서울 상위권 대학 진학 가능성 자체가 떨어지는 지역을 배려하는 입시 정책은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데 대부분 동의하실 것입니다. 모든 것이 서울과 수도권에만 집중되는 문제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 것 같고요.
하지만 일각에서는 비판도 나옵니다.
서울 상위권 대학을 그대로 둔 채 지역별 비례선발제를 해봤자 인재들은 결국 서울에 계속 살게 될 가능성이 높죠. 직장도 수도권에 주로 몰려있기 때문에 부동산 문제 해결과 국토균형발전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란 지적이죠.
틀린 지적은 아닙니다. 따라서 노무현 대통령이 추진했던 서울대 등 명문대 지방 이전까지 연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경제신문은 뜬금없는 지적을 합니다.
‘교육계 등에선 “교육정책에 대해 전문성이 없는 한은이 현실과 맞지 않은 정책 대안을 제시했다”는 비판 의견이 제기됐다.’
한마디로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이영애가 했던 ‘너나 잘하세요’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한은이면 금융정책이나 잘하지 왜 교육정책에 신경쓰냐는 건데요. 지난 금통위에서 기준금리를 내리지 않은 것을 마음에 담아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너나 잘하세요’를 돌려주고 싶네요. 한국경제신문은 지난 15일 ‘’학군의 힘‘…대치·목동·중계 재건축 상승행진’이라며 교육과 부동산의 상관관계가 매우 높다고 보도했거든요. 좋은 학군에 부동산 매수가 몰려들어 가격이 뜬다는 주장인데요. 이 논리대로라면 한은처럼 교육문제부터 해결해야 부동산의 꼬인 실타래도 풀리지 않을까요? 물론 한국경제는 부동산 가격이 계속 올라가길 바라기 때문에 이런 지적을 했겠죠.
게다가 어려운 문제는 한발 떨어져서 봐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의 편협한 시각이 아닌 열린 눈으로 바라봐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인데요. 그래서 ‘융합형 인재’가 각광받고 있죠. 따라서 한은이 교육에 대해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특히 한은 연구진들이 이번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인재는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하버드대 정치학과 앨런 교수의 말에서 착안했다는 데요. 주어진 조건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학생의 잠재력 그 자체를 발견하는데 우리 사회가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 줬다는 점에서 교육계는 물론 우리 사회 전체가 이번 연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 속담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