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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개미입니까? 베짱이입니까? 프리젠티즘의 저주

경불진 이피디 2019. 11. 22.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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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솝우화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요즘같이 후덥지근한 여름철에도 개미는 부지런히 일했습니다. 추운 겨울을 대비해 저장소를 만들고 음식을 날랐습니다. 반면 베짱이는 땀을 뻘뻘 흘리는 개미를 놀리며 기타만 쳤죠. 하지만 날이 점점 추워져 겨울이 찾아오니 베짱이는 개미를 찾아가 애원합니다. ‘개미님, 너무 배가 고파요. 먹을 것 좀 주세요’.

 

어린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개미와 베짱이이야기입니다. 미래를 대비하며 개미처럼 부지런히 일해라, 베짱이처럼 놀면 패가망신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죠. 그런데 요즘 학생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 아재소리 듣기 십상이라고 합니다. 알파고가 활약하는 21세기에는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죠. 오히려 다른 버전의 개미와 베짱이가 요즘 학생들에게는 익숙하다고 합니다. 다른 버전의 개미와 베짱이는 어떤 것일까요. 처음 설정은 똑같습니다. 하지만 결말이 완전히 다릅니다. 더운 여름날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한푼 두푼 모았던 개미는 티클은 모아야 티클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결국 파산한다는 군요. 반면 여름날 기타치고 노래만 불렀던 베짱이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진출해 아이돌 스타가 됐다고 합니다. 이솝우화보다 더 현실적이지 않나요.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휴가 계획을 세워야 할테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습니다. 개미처럼 일하길 원하는 상사가 버팅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같이 경기가 어려운 때에 휴가는 무슨이라고 뭉개는 경우도 다반사라고 합니다. 이 때문에 일주일이상의 장기 휴가는커녕 하루짜리 유급휴가도 내기 힘든 것이 우리네 직장인입니다.

실제로 지난해 8월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유급휴가를 보장받은 임금노동자는 10명 중 6명 정도(60.6%)에 불과합니다. 이마저 정규직 거의 정규직에나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정규직중 89.2%는 유급휴가를 보장받지만 비정규직은 10명 중 2.5명 수준인 겨우 24.8%만이 유급휴가를 갈 수 있습니다. 비정규직도 심각하지만 정규직의 11%나 유급휴가가 없다는 현실도 참 암담합니다.

 

그런데 유급휴가가 있다고 해서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고용노동부가 2014년 사업체 규모별로 연차 사용 실태를 조사했더니 평균 8.5일 쓰는 데 그쳤습니다. 전체 연차 중 절반을 간신히 넘은 57.8%를 소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서 지난해 서비스산업 종사자 22920명을 조사한 결과도 비슷합니다. 이들의 평균 연차 사용일수는 10.6(전체 연차 중 64.7%)에 불과했습니다.

 

직장생활이 다 그렇지라고 넘길 수도 있겠지만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억울해지기까지 합니다. 온라인 여행업체 익스피디아가 지난해 한국과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총 26개국의 18세 이상 직장인 927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유급휴가 국제비교 2015’ 통계에 따르면 유급휴가 소진율이 가장 높은 국가는 프랑스·브라질·스페인이었습니다. 이들 나라는 유급휴가 평균일수가 30일로, 소진율 100%를 기록했습니다. 오스트리아(25일 중 25)와 홍콩(15일 중 15)도 소화율 100%를 자랑했습니다. 싱가포르 93%(15일 중 14), 이탈리아 83%(30일 중 25), 멕시코 80%(15일 중 12), 미국 73%(15일 중 11) 등이 뒤를 이었습니다.

그럼 한국은 어떨까요. 한국은 15일의 절반에 못 미치는 6일을 사용해 소화율 40%로 꼴찌를 차지했습니다. 자랑스럽게도(?) 2년 연속 꼴찌입니다. 일벌레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일본마저도 20일 중 12일을 쓰는 것으로 나타나 60%로 한국보다 한단계 높았습니다.

 

엄연히 법적으로 보장된 유급휴가를 제때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요. 전 세계가 공통적으로 지목하는 이유 중 하나는 워커홀릭 현상의 심화입니다. 미국의 경제학자 W 오츠가 워커홀릭이란 책에서 처음 사용한 이 용어는 가정과 개인사보다는 일을 제일 우선시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물론 자발적인 워커홀릭도 있습니다. 문제는 비자발적인 워커홀릭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프리젠티즘(Presenteeism)현상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프리젠티즘은 쉬고 싶은데도 심지어는 아픈데도 개미처럼 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자리만 지키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모든 것을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으로 처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서 이런 프리젠티즘은 더욱 확산되고 있다고 합니다. 어차피 집에서 쉬어봤자 끊임없이 카톡이나 메신저로 업무지시가 떨어질텐데 차리라 회사에 출근하는 것이 낫다는 이야기죠.

 

그런데 최근 세계 경영학계에는 프리젠티즘 확산을 우려하고 있다고 합니다. 책상에 앉아만 있다고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것처럼 자리를 지킨다고 생산성이 높아지지 않는다는 것이 각종 연구를 통해 증명됐기 때문입니다. 미국 코넬대 연구에 따르면 프리젠티즘 때문에 억지로 출근하는 직장인은 매년 255달러(295000)의 비용을 회사에 더 부담케 만든다고 합니다. 업무 집중도가 떨어지고 작업의 완성도, 정확성이 저하돼 생산성이 크게 악화되기 때문입니다. 매년 29만원이 크지 않아 보이지만 직원이 1000명인 기업이라면 무려 매년 약 3억원의 비용이 더 드는 셈이죠. 이에 따라 미국 전체 기업이 입는 손해는 매년 약 1800억 달러(170조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정말 엄청난 숫자입니다.

 

덴마크 동앵글리아대 연구는 더 심각합니다. 우체국 집배원과 그들의 상사를 3년간 분석한 결과, 근무시간을 늘려 일하라고 강요하는 직장상사가 많을수록 기업이 손해를 입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직원들의 근무시간이 늘어나면 생산성도 높아질텐데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이유가 뭘까요. 연구에 따르면 이런 강압적인 상사가 있을 경우 직원들은 눈치를 보느라 휴가는 물론 병가도 제대로 쓰지 못한다고 합니다. 아파도 끙끙 앓다가 3년 정도 지난 후 한꺼번에 병가가 쏟아져 결국 기업에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설명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개미처럼 일만하다가 파산하는 것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럼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구체적으로 비용이 얼마나 더 드는지에 대한 연구는 없지만 프리젠티즘 실체를 엿볼 수 있는 자료는 있습니다. 경향신문에 5일자로 보도한 고려대 보건과학과 역학연구팀과 이화여대·토론토대 연구진과 공동 연구한 아플 때도 일하는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논문이 그 주인공인데요. 전일제 노동자 2661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상대적으로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하는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아파서 쉬는 병결 경험은 되레 4~43%가량 적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반면 아파도 일하러 나온 프리젠티즘 경험은 하청 노동자들이 원청 정규직보다 20~61%가량 높았습니다. 이는 비정규직이 덜 아픈 것이 아니라 아픈데도 참고 일하는 프리젠티즘빈도가 높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비정규직의 경우 고용이 불안한 데다 아파서 쉴 경우 기존의 저임금이 더 떨어질 것을 우려하기 때문으로 분석됩니다.

 

앞서 유급휴가를 보장받은 정규직은 89.2%에 달하지만 비정규직은 24.8%에 불과하다는 통계청 조사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영국 BBC는 지난해 말 프리젠티즘이 만연한 우리 기업문화를 신날하게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BBC는 직장 상사보다 먼저 출근해 늦게 퇴근하는 프리젠티즘 때문에 한국이 산업화 국가 가운데 가장 높은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의 조사결과를 인용해 응답자의 4분의 1인 높은 수준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고, 주된 요인으로 직장에서의 문제를 꼽았다고도 전했습니다.

 

문제는 상사의 눈치를 보며 휴가도 가지 않고 아픈데도 쉬지 않는다고 회사에서 알아줄까요. 월급이 오르고 승진도 하게 될까요. 미국의 경제전문예측기관인 옥스퍼드이코노믹의 조사에 따르면 유급휴가를 다 쓰지 못한 직장인은 전부 사용한 직장인보다 승진이나 보너스를 받을 기회가 오히려 6.5% 낮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휴가를 다 쓰지 못한 직장인이 능력부족으로 일을 마치지 못해 휴가를 가지 못한 것인지, 스트레스를 더 받아 생산성이 낮은 것인지에 대한 조사는 없지만 이것만으로도 휴가를 갔다고 일에 지장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물론 미국의 사례이긴 하지만 한국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제 주변만 봐도 회사에 목숨 걸고 충성을 다했던 직장인들이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경우을 무수히 봤습니다.

 

24시간, 365일 내내 에너지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개미처럼 일만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적당한 휴식은 모든 직장인에게 필수입니다. 베짱이처럼 더운 여름에는 노래도 부리고 기타도 튕겨야 창의력도 생기고 생산성도 올라갑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권위적인 상사에게 개인적으로 개미처럼 일할 수 없으니 휴가를 달라고 요구하긴 힘들 것입니다. 따라서 노조가 있다면 도움을 받는 것이 최선입니다. 하지만 국내기업의 노조 조직률을 10%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현실적으로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이 때문에 그래 어쩔 수 없어라고 포기하는 직장인들도 있을 것입니다. 천상 개미인가 봐라고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말이죠. 그래도 개미처럼 일하다보면 추운 겨울 대비는 할 수 있을 거야라고 위안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처럼 꾹 참고 개미처럼 일만했다가는 어떻게 될까요. 개미와 베짱이 신버전처럼 티클은 모아야 티클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건강을 버리고 파산할 수도 있죠. 따라서 스스로부터 개미와 베짱이의 신화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일할 때는 일하고 놀 때는 노는 당당함부터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요구할 것을 당당히 요구해야 개미와 베짱이 신화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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