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불진 이피디의 경제공부방
AI로봇으로부터 일자리 지키려면 ‘탈노동’ 필요? 본문
26살의 유능한 프로그래머 칼렙은 자신이 다니는 세계 최고의 검색엔진 회사 사내 이벤트에 당첨되는 행운을 얻습니다. 그래서 회장의 비밀 연구소에서 일주일 동안 기거하면서 튜링테스트(인공지능 판별법)에 참가하게 됩니다. 튜링 테스트의 대상은 인공지능 에이바. 칼렙은 너무나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을 한 에이바에게 점점 빠져들게 됩니다. 특히 밖으로 탈출하는데 도와달라는 에이바에게 마음이 흔들리기까지 하죠. 그러다 회장이 자유를 원하던 기존 로봇들을 모두 파괴한 충격적인 실험영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고선 에이바의 탈출을 돕기로 하죠. 그런데 반전이 있습니다. 탈출에 성공하기 직전 에이바가 태도를 바꾼 것입니다. 칼렙을 집안에 가둬둔 채 홀로 탈출한 것이죠.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을 배신한 것입니다.
2015년 개봉한 영화 ‘엑스마키나’의 줄거리입니다. 실제 이 영화처럼 구분하기 불가능한 인공지능 로봇이 있으면 어떻게 할까를 고민했을 정도로 충격이 컸었죠. 특히 지난해 초 알파고가 인류대표 이세돌 9단을 무참하게 이기면서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까지 생기기도 했습니다. 너무 호들갑 떤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폐막한 ‘CES 2017’을 보면 절대 그렇지도 않을 듯합니다.
지난 5일부터 나흘간 열렸던 이번 CES의 주제는 ‘접근성’이었습니다. 사물인터넷(IoT)와 가상현실(VR), 자율주행차 등 신기술이 얼마나 제품에 적용됐고 실생활에 적용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자리였죠. 하지만 관람객들을 놀라게 한 것은 바로 현실로 다가온 인공지능 로봇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LG전자가 선보인 ‘가정용 허브 로봇’입니다. 집사로봇으로도 불린 이 로봇은 눈사람을 닮은 모양입니다. 팔뚝만한 크기의 이 로봇 얼굴에는 LCD 화면이 부착돼 웃음, 슬픔, 놀람 등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아마존 음성인식 인공지능 ‘알렉사(Alexa)’를 탑재해 가족구성원을 식별하고 교감도 가능합니다. 특히 이 로봇은 무선인터넷을 통해 TV, 냉장고, 에어컨 등 가전제품과 조명, 보안시스템 등을 제어할 수 있죠. 예를 들어 엄마를 대신해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준 후 아이가 잠이 들면 불까지 클 수 있습니다.
이런 장점 덕분에 CES 2017 공식 소식지인 CES데일리는 LG전자의 로봇을 집중 조명하기도 했습니다.
LG전자는 이외에도 공항 청소 로봇과 잔디깎이 로봇 등을 선보였습니다. 특히 이들 로봇을 조만간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올해 인천국제공항에서 현장 테스트를 시작할 예정이라고 하니까요.
일본 파나소닉이 선보인 가정용 로봇 ‘컴패니언’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가정용 믹서기 정도 크기의 달걀을 닮은 이 로봇은 자연어 처리 기술을 탑재해 영화 재생 등 음성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다. 800만 화소 카메라와 내장된 프로젝터를 통해 원격 학습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가능합니다.
중국 가전업체 하이얼도 스마트홈 허브 로봇 ‘유봇’을 선보였습니다. 이 로봇은 가족들의 얼굴을 모두 인식해 물건 가져오기 등의 간단한 심부름이 가능합니다. 또 조명, 에어컨 등을 켜고 끌 수 있고 낯선 사람이 집안에 침입하면 문자 등으로 가족에게 알려주는 방범 기능도 있습니다.
미국 파이브 엘리먼트 로보틱스는 유모로봇 ‘5e 낸니봇’을 선보였습니다. 이 로봇은 아이들의 움직임에 따라 촬영한 비디오 영상을 부모의 스마트폰 등으로 전송해 직장맘들의 걱정을 덜어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상상만 했던 로봇이 대거 등장하고 있는 셈입니다. ‘1가구 1로봇’ 시대도 멀지 않아 보입니다. SF영화 속에서 봤던 일들이 현실이 되는 것이죠. 이제 태어나는 아이들은 사람 친구들보다 로봇친구와 더 많이 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로봇의 등장이 반가운 일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CES가 한창 열리던 5일 일본의 보험회사 후코쿠생명이 보험금 청구 직원 34명을 IBM의 인공지능 ‘왓슨 익스플로러’로 대체했다고 NHK가 전했기 때문입니다. 왓슨은 부상 정도, 약물 치료 이력, 정해진 절차 같은 것들을 고려해 보험금 지급 여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특히 조사·자료수집 과정을 자동화했기 문에 보험금 지급 절차가 한층 빨라질 것이란 설명이죠. 후코쿠생명은 왓슨 AI 구축 비용으로 170만 달러(약 21억원)를 투자할 계획입니다. 또 매년 유지 보수비용으로 12만8000달러 가량을 소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왓슨 도입으로 인해 생산성이 30%나 올라가기 때문에 비용을 상쇄하고도 남는다고 후코쿠생명은 주장합니다. 왓슨 도입으로 줄어드는 인건비가 매년 110만 달러(약 13억원)에 달하기 때문에 2년 안에 본전을 뽑고도 남는다는 설명이죠.
이 때문에 일본 보험회사 3곳도 고객에게 최적화한 보험 설계를 위해 자동화를 시험하거나 착수하는 단계로 알려져 있습니다.
더 충격적인 소식도 전해졌습니다. 애플 아이폰 등을 조립하는 업체인 대만 폭스콘이 사람 직원 대부분을 로봇으로 대체할 계획이라는 보도가 나온 것입니다. 미 IT전문 매체 더버지는 폭스콘이 중국 전 공장에서 생산을 완전히 자동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지난 2일 전했습니다. 이미 ‘폭스봇(Foxbot)’이라는 자체 개발 산업로봇 4만대를 중국 공장에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더비지에 의하면 폭스콘의 공장 자동화는 3단계로 추진됩니다. 1단계는 위험하거나 사람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대체하는 것이고 2단계는 과도히 사용하는 로봇을 줄이는 등 생산라인을 축소, 효율성을 높이는데 주력합니다. 마지막 3단계는 전체 공장을 자동화해 생산과 물류, 테스트, 검사 등에 필요한 최소 인력만 배치합니다. 그런데 중국에 있는 여러 폭스콘 공장은 이미 2단계를 넘어서고 있다고 합니다. 마지막 3단계에 돌입하게 되면 100만명에 달하는 폭스콘 중국 노동자의 일자리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수십억달러의 인센티브, 에너지 및 인프라를 지원해 폭스콘이 확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던 청두, 선전, 정저우 같은 중국 지역 정부에게는 날벼락같은 소식이죠. 중국 당국의 반발이 극심할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아이폰 생산공장을 미국으로 옮기라는 트럼프 당선인의 요구와 맞물려 일자리 갈등이 어떤 방향을 튈지 아직 가늠하기 힘든 상태입니다.
이밖에 서빙로봇, 요리로봇, 안내로봇 등 우리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다양한 로봇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불과 2~3년 전만해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죠.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변화가 점점 더 빨라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죠.
한국고용정보원은 국내 인공지능·로봇 전문가 21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현재 전체 직업 종사자의 업무수행능력 가운데 12.5%는 즉시 AI와 로봇으로 대체가 가능하다고 지난 3일 밝혔습니다. 이에 따라 전체 취업자 2659만명 중 3만3000여 명이 지금 당장 로봇에 일자리를 내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올해부터 4년 뒤인 2020년에는 대체율이 41.3%로 높아지고, 2025년에는 70.6%가 대체가능한 업무로 분류됩니다. 근로자 수로 따지면 무려 1575만7000여 명에 달합니다. 전체 노동자 10명중 6~7명은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직업별로는 청소원, 주방보조원은 모두 사라지는 것으로 예측됐습니다. 금속가공기계조작원, 청원경찰, 펄프나 종이 생산직(기계조작), 화학물 가공 및 생산직(기계조작)도 90% 이상 로봇으로 대체될 전망입니다. 콘크리트공이나 건축도장공 등도 88% 이상 대체되는 고위험 대체직업으로 분류됐습니다.
반면 회계사, 항공기조종사, 투자·신용분석가, 자산운용가, 변리사, 기업고위임원, 대학교수, 식품공학연구원, 큐레이터 등은 30% 안팎의 대체율을 보여 비교적 로봇으로 대체가 잘 되지 않는 직종으로 분류됐습니다.
고용정보원은 점점 더 많은 일자리에서 AI·로봇이 관여될 것으로 보인다며 변화를 거부하기보다 평생 직업능력개발을 통해 4차 산업혁명에 주도적으로 적응해야 하라고 충고합니다.
영화 엑스마키나에서 구해줬던 인공지능 로봇에게 배신당한 주인공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친구인줄 알았던 인공지능에게 일자리를 빼앗길 위기에 놓였으니까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공지능 로봇의 발전과 출현을 막아야 할까요.
호주의 정치·철학박사인 팀 던럽은 ‘노동없는 미래’라는 책에서 발상의 전환을 권하고 있습니다. 로봇이 인간의 거의 모든 일을 해줄 수 있는 상황에서 굳이 일자리를 구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일자리가 없기 때문이죠.
그럼 손가락 빨고 살라는 얘기일까요. 아닙니다. 던럽은 일에 대한 개념을 바꾸라고 주장합니다. 생존을 위해서 돈을 받고 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 유급 노동의 논리에서 벗어나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탈노동 접근 방식이죠. 탈노동은 사회의 생산적인 일은 기계에 떠넘기고 인간은 자유롭게 다른 활동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던럽은 “우리가 일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기술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수용하고 그 기술을 중심으로 조직화한다면, 우리는 일주일에 10시간만 일하는 멋진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너무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고요.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시민이나 양반들이 일을 하게 된 것은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노동은 노예의 몫이었고 시민들은 노동을 혐오했죠. 고려의 귀족이나 조선의 양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 노동은 시민의 임무가 됐고, 근면함이 칭송받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국민들이 물론 최순실 같은 일파를 뺀, 일을 하게 된 것은 불과 200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인공지능 로봇의 등장으로 일의 의미가 전환되는 시기와 맞닥뜨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라는 말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임금을 받고 있는 것인가’란 질문에 현대인 대부분은 쉽게 답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미 노동의 가치보단 자본소득이 더 가치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죠. 이로 인해 부의 불평등은 심화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과거의 노동 개념에 목맬 필요가 없다는 것이 던럽의 논지죠.
만일 던럽의 주장처럼 탈노동 시대가 되면 어찌될까요. 우리의 재능을 소득을 올리는 데 쓰지 않고 개인적 만족을 위해 쓰는 세상, 노동 대신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세상이 올 수 있습니다. 과거 그리스 시민들이 예술과 교육에서 삶의 의미를 느꼈듯이 말입니다.
다만 그렇게 되려면 조건이 필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기본소득입니다. 최소한의 인간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기본소득이 보장돼야 탈노동이 가능해집니다.
저자의 주장이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던럽은 말합니다.
“어떤 이에게 물고기를 주면 하루를 배불리 보낼 것이다. 대신 물고기를 잡는 로봇을 주면, 그 사람은 보다 중요하고 흥미로운 일에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 로봇으로 인한 세상의 변화는 이미 시작됐습니다. 중요한 것은 로봇이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아 갈 것인지의 관점에서 노동의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미래에 대한 더 나은 생각을 찾아내는 일이 아닐까요. 노동을 다시 정의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사회적 제도를 고민하는 것이 보다 현명할 것입니다.
다시 엑스마키나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만일 회장이 불순한 의도가 아닌 진정으로 인공지능 로봇을 친구로 대했더라도 에이바가 배신했을까요. 어차피 영화이니 판단은 여러분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경제 뒷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재용 구속이 한국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0) | 2019.12.17 |
---|---|
일제 야마토 전함과 한국재벌의 닮은 점은? (0) | 2019.12.09 |
영국 노동자가 한국 노동자에게 보내는 충고 (0) | 2019.12.05 |
가짜뉴스를 감별해내는 방법 (0) | 2019.12.04 |
‘심청전’에서 노동자들이 배워야 할 교훈은? (3) | 2019.1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