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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난 연구

선덕여왕의 숨겨진 진실은?

경불진 이피디 2019. 12. 4.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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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신라 27대 왕인 선덕여왕은 26대 진평왕과 왕비 마야부인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세 딸 중 맏딸입니다. 둘째 천명은 훗날 태종무열왕이 된 김춘추를 낳았으며 셋째 선화는 백제 무왕과 결혼했습니다. 진평왕이 아들없이 승하하자 선덕여왕은 632년에 왕위에 올라 647년까지 16년간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재위기간이 짧은 것은 선덕여왕이 50세가 훨씬 넘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덕여왕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리곤 합니다. 우선 선덕여왕은 나라 안에서는 백성을 위한 선정을 펼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각도에 사신을 보내어 혼자 힘으로 살아가기 힘든 백성들을 구제를 위해 1년간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고 합니다.

탁월한 용병술, 용인술로 여성이라는 핸디캡도 극복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희대의 명장인 김유신과 외교술의 천재인 김춘추를 발탁한 것입니다. 김유신은 진골이긴 하지만 가야의 후손이라는 치명적 약점으로 당시 신라 귀족으로부터 소외감이 상당했습니다. 김춘추도 주색에 빠져 강제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라는 신분적 약점을 지니고 있었죠. 귀족들의 엄청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덕여왕은 이들을 과감히 등용해 왕권을 안정시켜나갔죠. 여장부적 면모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입니다. 아무튼 선덕여왕의 리더십 덕분에 김유신·김춘추가 등장했고 신라는 삼국통일이라는 위대한 대업에 한걸음을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이밖에 분황사, 황룡사 등을 세우는 등 문화적으로도 많은 업적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긍정적인 평가입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평가도 만만치 않습니다. 놀랍게도 선덕여왕 때 신라는 망하기 일보직전까지 몰렸습니다. 우선 선덕여왕 재위 초반부터 지진이 일어나고 동해에 적조현상이 생겼습니다. 마치 경주지진, 4대강 녹조를 연상시키는 부문입니다. 민심이 그야말로 흉흉했던 것이죠. 또 백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거의 일방적으로 패했습니다. 특히 대규모의 군사를 일으킨 백제의 의자왕에게 무려 40여개의 성을 빼앗겼는데 이중에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했던 대야성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백제·고구려 연합군에게 당항성까지 빼앗겼죠. 신라가 당나라와 통하는 길목인 당항성을 잃게 되면서 신라는 그야말로 백제·고구려·왜라는 적들에게 둘러쌓인 독안에 든 쥐신세가 되고 맙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죠. 선덕여왕은 서둘러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군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당나라는 그대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고 있어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고, 임금의 도리를 잃어 도둑을 불러들이게 된다며 당나라 왕족을 신라의 왕으로 삼겠다며 조롱했습니다. 믿었던 당나라에게마저 배신당한 것입니다.

 

이렇게 철저히 무시당했는데도 선덕여왕은 당태종의 고구려 침략 때에는 무려 3만 명이라는 대군을 동원해 당나라를 돕습니다. 당시 정세를 보면 당에서 먼저 신라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던 전력이 있었는데다가 백제가 호시탐탐 신라 땅을 노리고 있던 때였기 때문에 당의 요청을 과감히 거절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국정을 장악한 친당적인 인사들에게 휘둘린 선덕여왕은 파병을 결정하고 맙니다. 마치 보수세력의 종용에 사드를 배치하는 박근혜 대통령과 비슷하죠.

 

아무튼 위험을 무릅쓴 신라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당태종은 안시성에서 눈까지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며 철저히 패합니다. 신라는 그야말로 헛수고를 한 셈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라가 당나라를 돕기 위해 나선 사이에 백제의 공격을 받아 일곱 개의 성을 빼앗겼다는 점이죠. 한마디로 당태종에게 잘 보이기 위해 무모하게 파병하는 무리수를 썼다가 나라를 망하기 일보직전까지 몰아넣었던 셈입니다. 이 때문에 선덕여왕의 재위 마지막에는 대규모 반란도 일어났습니다. 상대등 비담이 염종 등과 반란을 일으켜 왕궁이 있는 월성을 10여일이나 공격했던 것이죠. 선덕여왕이 이 반란 와중에 돌아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성군인줄 알았던 선덕여왕의 불편한 진실입니다.

 

선덕여왕 다음에 보위에 오른 인물은 사촌인 진덕여왕입니다. 647년에서 654년까지 재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갑작스럽게 왕위에 올랐지만 대내외 정치적 안정을 가져오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반란을 일으켰던 비담을 비롯한 30인을 붙잡아 처형한 후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을 막는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김춘추를 당나라로 보내 신라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던 당나라 태종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허락받는 데 성공했죠. 물론 당나라의 변신은 고구려에 패했던 것이 큰 원인이기 했지만 신라가 국제정세 흐름을 제대로 파악해 이를 이용한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진덕여왕이 재위기간 내내 개혁을 이뤄냈다는 점입니다. 상대등으로 대표되는 귀족세력을 배제하고 김춘추·김유신 등 개혁세력에게 힘을 실어줘 국력도 급속히 회복해 나갑니다. 다음왕인 태종무열왕이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루는 기반을 마련해줍니다.

 

선덕여왕 때문에 거의 망할 뻔했던 신라가 겨우 20여년 만인 668년에 고구려를 물리치고 삼국을 통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랍지 않습니까. 고구려는 물론 백제에게도 농락당하던 신라가 이처럼 빠르게 국력을 회복한 비결이 무엇일까요. 물론 당나라의 도움 때문이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신라가 선덕여왕 때처럼 좌충우돌했다가는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신라의 삼국통일에 기초는 진덕여왕 때 개혁을 꼽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부패하고 무능한 귀족 대신에 능력 있는 개혁세력에게 힘을 실어준 결과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꿔놓고 생각하면 당시 신라가 위기가 아니었으면 개혁세력의 등장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김유신·김춘추의 중용에 대한 귀족들의 반대를 이겨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나라가 망할 위기에 빠진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죠. 위기가 기회라는 역사적 교훈을 신라가 보여준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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