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불진 이피디의 경제공부방

위대한 탈출? 불평등의 기원? 본문

경제 뒷이야기

위대한 탈출? 불평등의 기원?

경불진 이피디 2019. 12. 1. 20:36
반응형

 

 

노벨상 중 가장 논란을 많이 일으키는 것을 꼽으라면 경제학상이 가장 먼저 거론될 것입니다. 태생 논란은 물론이거니와 미국 주류 경제학계가 노벨상을 독식한다는 비난이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무려 28명이나 노벨경제학상수상자를 배출하며 신자유주의의 이념적 토대를 마련 시카고대학 출신이 노벨상을 놓친 해에는 시카고 경제학과생들의 과제가 배로 늘어난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노벨상을 많이 받긴합니다.

게다가 국적도 논란거리입니다. 역대 노벨경제학 수상자를 살펴보면 역대 수상자 중 미국인은 55명으로 가장 많습니다. 다음은 영국(9), 프랑스·노르웨이(각각 3) 순입니다. 비서양인 수상자는 1998년 수상자인 인도의 아마르티아 센이 유일하죠. 중국, 일본, 남미 등 비 서양인 수상자를 자주 배출하는 다른 노벨상과는 달리 매우 폐쇄적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최근 벌어지는 논란은 태생이나 미국의 독식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해석 논란입니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제시한 경제이론이 어떤 함의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해석에 차이가 난다는 이야기죠. 경제이론이란 게 하나인데 해석이 다르다는 게 말이 될까요.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이론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 실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비상식적인 일은 국내에 한정됩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이런 논란이 없다는 이야기죠.

 

지난 10일 발표된 2016년 노벨경제학상의 영광의 수상자는 올리버 하트(68) 미 하버드대 교수와 벵트 홈스트롬(67)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입니다. 오랜만에 진보적인 학자가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셈이죠. 아마도 올해 시카고대 경제학과 학생들은 엄청난 과제를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두 교수는 계약이론을 확립한 공적을 인정받아 수상자로 결정됐습니다. 계약이론이란 인간의 모든 경제활동이 계약관계로 이뤄지고 있으며 서로가 완전히 투명하고 공정하게 계약을 체결할 때 사회 전체의 효용(utility)이 증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노벨위원회도 현실 경제에서는 이해가 상충하는 다양한 계약으로 이뤄졌다이들 교수가 만든 이론적 기틀은 실생활에서의 계약과 제도, 설계 과정에서의 함정을 이해하는 데 가치가 있다고 수상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언론들이 전하는 뉴스를 살펴볼까요.

노벨경제학상에 '계약이론'성과연봉제의 틀 제시(조선일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가 설파한 성과주의의 필요성(서울경제)

 

일부 보수 신문들은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계약이론이 성과연봉제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있다는 식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우선 조선일보는 홈스트롬 교수가 주로 회사와 직원 간의 근로 계약 과정에서 양측이 어떻게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지 주목했다고 전합니다. 이런 연구를 바탕으로 그는 1970년대부터 기업의 주인인 주주가 최고경영자와 성과를 연동시킨 계약을 맺어야 기업 실적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주장해 관심을 모았다는 군요. 이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기업이 채택하고 있는 경영자 성과 연봉제의 이론적 바탕이 됐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서울경제는 사설을 통해 계약이론의 대표적인 것이 노사의 임금 계약이라고 전합니다. ‘고용주는 근로자들이 성과를 내놓기 전까지는 그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일을 얼마나 잘하는지 알기 힘들다. 능력이 서로 다른데 똑같은 임금을 주는 것은 비효율적일 뿐 아니라 시간만 지나면 임금이 상승하기에 근로자가 노력을 하지 않는 도덕적 해이를 가져올 수도 있다. 이는 CEO와 주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성과주의를 기업 경영 전반에 도입하지 않는다면 생산력을 향상할 수도, 혁신도 이룰 수도 없다는 게 하트와 홈스트롬 교수가 내린 결론이다.’

 

그런데 두 신문 모두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CEO와 주주 관계를 언급한 부분입니다. 서울경제는 노사관계로 확대했는데 조선일보는 경영자 성과 연봉제라는 말로 CEO와 주주 관계로 한정짓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두 교수의 이론을 살펴보면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트와 홈스트롬 교수의 계약이론은 실상 불완전 계약이론입니다. 기업과 개인, CEO와 주주 등 모든 거래 관계가 시장법칙에 따른 합리적 선택으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태반인데 그 이유를 정보의 비대칭에서 찾습니다. 이런 비대칭이 비효율을 발생시킨다는 이야기죠. 예를 들어 기업에서 부품을 납품받으려 할 때 납품업체는 생산비용을 잘 알고 주문업체는 잘 모릅니다. 따라서 납품업체는 제품 가격을 정상보다 높일 수 있습니다. 반면 주문업체는 손해보고 부품을 공급받을 수 있죠. 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 법칙이 아니라 정보에 따라 가격이 좌우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노동시장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같은 정보 비대칭 때문에 주인-대리인 모델이 발생한다는 것이죠. 주인-대리인 모델은 주인이 대리인을 고용해 어떤 일을 맡길 경우, 완벽하게 파악될 수 없는 대리인의 행태로 인해 고용계약 체결 후 야기되는 주인과 대리인 간 이해관계의 불일치를 뜻합니다. 예를들어 대리인에게 얼마나 성실하게 일해야 한다는 것은 계약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몇시간 일해라, 매출·이익은 얼마까지 올려라는 식으로 계약할 수 밖에 없죠. 그러면 대리인은 시간만 채우고 성실히 일을 하지 않는다던가, 미래가치가 손상되더라도 현재 성과만 내는 식으로 일해 결국 회사를 망하게 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즉 대리인이 주인의 이익보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때 발생하는 이런 문제를 대리인 문제또는 대리인의 딜레마라고 합니다. 두 교수 중 하트 교수는 이런 문제에 주목했습니다. 공기업 민영화의 경우에 비슷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예를들어 소방서의 경우 외주화할 경우 계약을 소방장비는 얼마나 비치하고 인력은 얼마나 유지하고 등과 같은 계약을 맺게 됩니다. 그런데 소방업무를 담당하는 소방관들의 개인적인 능력까지 계약하지는 못합니다. 소방관들이 얼마나 업무를 잘하는지, 사명감있는지는 평가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이런 점 때문에 바로 대리인의 딜레마가 발생합니다. 소방업무를 외주로 맡은 업체는 싼 임금으로 능력이 떨어지는 소방관을 채용하게 되죠. 이를 통해 줄인 비용을 성과랍시고 내밀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업체 능력있데, 비용을 이렇게나 줄였어라며 외주계약을 연장하게 되죠. 결국 소방 서비스는 엉망이 되고 맙니다.

두 교수는 이같은 불완전 계약 때문에 소방서, 교도서, 학교 등의 민영화는 문제가 많다고 지적합니다.

 

보수언론이 주창하던 민영화 논리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이야기죠. 성과연봉제는 어떨까요. 두 교수는 스톡옵션 등 인센티브를 통해 대리인의 딜레마를 줄일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면 조선일보의 주장대로 성과연봉제를 찬성하는 걸까요.

 

두 교수는 오랜 기간 회사와 CEO를 포함한 직원 간의 근로 계약 과정에서 양측이 어떻게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지를 연구한 결과, 성과연봉제의 효과는 제한적이라 지적합니다. 주주와 CEO 등에 한정돼서 효과가 나타난다는 거죠. 이유가 뭘까요. 실제로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를 측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CEO와 같이 성과가 기업실적으로 나타나는 경우에나 가능하다는 거죠. 따라서 두 교수는 오히려 성과 측정이 어려울수록 가능한 성과에 기반을 둔 보수를 줄여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성과 급여는 경영상 업무를 하는 CEO 등을 평가할 때만 쓰여야 한다고 주장이죠.

 

왜 그렇게 해야 할까요. 두 교수는 교사를 예를 들고 있습니다. 교사들에게도 성과연봉제를 도입해 월급을 지급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교사들은 본연의 업무인 학생들의 인성과 창의성을 높인다던지 독립적인 사고를 기르는 것을 등한시하게 됩니다. 단지 시험성적을 높이는데 열을 올리게 되죠. 왜냐고요. 교사들의 성과를 측정하는데 학생들의 인성과 창의성이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독립적인 사고 측정도 할 수 없죠. 따라서 학생들의 시험성적으로 교사를 평가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교사들은 단지 시험성적을 높이는데 열을 올리게 되죠. 자칫 부정행위까지 눈감아 줘서라도 성적을 올리려 할지도 모릅니다.

 

한마디로 성과 불가능한 업무에 성과연봉제를 도입하게 되면 부작용이 심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두 교수를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한 스웨덴 왕립과학원도 기업의 성과는 시장 상황 등 다양한 변수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단순히 성과에만 의존해 인센티브를 지급하면 운에 따라 급여가 결정되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위험이 큰 산업일수록 인센티브 보다는 고정적인 급여를 더 늘려야 직원의 성과를 높일 수 있고 안정적인 분야에서는 성과급 비중을 늘리는 것이 낫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수언론의 설명과는 확연히 차이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보수언론들의 이같은 아전인수격 해석은 올해가 처음은 아닙니다. 지난해에도 큰 논란을 빚었습니다. 지난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는 미국 프린스턴대의 앵거스 디턴 교수였습니다. 그런데 수상 소식이 나오자마자 불평등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디턴 교수가 좋은 불평등론으로 상을 받았다등의 기사가 쏟아졌습니다. 더 나아가 ‘21세기 자본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토마 피케티와 대결구도까지 만들어낸 언론도 있었습니다. ‘불붙은 파이 논쟁디턴 키워라” Vs. 피케티 나눠라”’ 식으로 말이죠. 특히 조선일보는 디턴 교수에게 노벨경제학상을 안긴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일부 경제학계에서 피케티류의 평등주의적 접근 방식에 힘이 실리는 것에 대한 경계감을 나타낸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또 디턴 교수의 책 위대한 탈출을 출간한 한국경제신문디턴이 피케티의 대항마이고, 디턴이 불평등이야말로 성장의 또 다른 기회라고 역설했다고 보도하기도 했죠.

 

문제는 디턴 교수의 이론을 일부 언론들이 멋대로 해석한데 있습니다. 디턴 교수의 책 위대한 탈출의 왜곡 번역돼 있었는데 이를 그대로 받아썼기 때문이죠. 실제로 이책의 원제는 위대한 탈출-건강, 부 그리고 불평등의 기원인데, 국내 번역서의 부제는 불평등은 어떻게 성장을 촉발시키나입니다.

또 표지 밑에는 피케티 vs 디턴, 모두가 불평등을 외치는데 디턴 교수는 왜 세계가 어느 때보다 평등해졌다고 말하는가라는 문구도 달았습니다. 의역을 넘어 초를 너무 쳤던 셈이죠. 디턴 교수까지 국내 출판사에 항의 메일을 보냈을 정도입니다. 논란이 불거지자 출판사는 사과문까지 발표하면 책을 다시 펴내는 수모까지 당했습니다.

 

실제로 최근 방한한 디턴 교수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부유층을 쫓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하는데, 그럴 기회가 충분하지 못해 빈곤층이 분노하고 있다사람들은 부()에 분노한다기보다, 부당하게 축적된 부에 분노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불평등이 성장의 기회라고 주장했던 보수 언론들의 설명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그럼 왜 이런 아전인수격 해석이 난무하고 있을까요. 노벨상마저도 이념 투쟁의 도구로 삼으려는 의도 때문이 아닐까요. 그동안 노벨경제학상을 휩쓸었던 신자유주의가 퇴색하고 전 세계적으로 199 등 불평등 문제 해결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든 되돌리고 싶은 심정 때문일까요. 하지만 이런 불순한 의도는 철저히 깨질 것입니다. 따뜻한 경제를 원하는 경제브리핑 애청자들이 가만히 있지않을테니 말입니다. ‘죽은 아이 불알 만지기식으로 철지난 신자유주의에 목메고 있는 일부 언론의 보도 태도가 안타까움 넘어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728x90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