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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비관주의에 더 끌리는 이유는?

경불진 이피디 2020. 6. 15.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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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베스트셀러 작가인 그레그 이스터브룩은 비관이 만드는 공포 낙관이 만드는 희망’(움직이는서재 펴냄)에서 눈에 띄는 주장을 합니다. 그러면서 재미난 예를 많이 드는데요.

 

대표적인 것은 미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산업 관련입니다. 2008년 혼다자동차는 인디애나주 그린스버그에 8억 달러를 투자해 대규모 공장을 지었습니다. 2300명을 고용해 고연비의 시빅모델을 생산하는 공장을 만든 것이죠. 특히 매립용 폐기물을 전혀 발생시키지 않을 정도의 내부 재활용 시스템을 활용하는 최첨단 공장입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미국인들이 알았을까요? 미국을 대표하는 대부분의 언론들이 이 공장의 준공을 외면했습니다. 신문은커녕 TV 뉴스에도 나오지 않거나 단신 처리했죠.

 

그런데 몇 달 후 자동차 부품업체인 테네코는 인근의 노후한 자동차 부품공장을 폐쇄하기로 결정했죠. 그런데 이 결정은 죽어가는 러스트 벨트의 상징으로 미국 주류 언론의 광범위한 주목을 받았습니다. 특히 지역 언론들마저 이번 폐쇄 결정 이후에 발생한 화재와 범죄를 집중적으로 보도했죠. 화재와 범죄 수치는 장기적으로 줄어들고 있는데도 말이죠. 이에 따라 미국의 자동차산업은 한동안 어려움을 크게 겪었죠.

 

경제가 좋아지는 것은 애써 외면하고 나쁜 것만 부각시키는 것이 우리 언론들의 행태와 매우 비슷하죠. 그런데 미국 언론들이 이런 행태를 보이는 이유가 뭘까요?

 

많은 과학자들은 비관이 인류가 생존을 위해 택한 습성이라고 지적합니다. 인류 조상 중 태평했던 사람보다는 걱정이 많았던 사람이 주변 환경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우연한 위험에 더 잘 대처해 더 많은 자손을 남겼을 것이란 설명이죠. 즉 낙관론보다 비관론이 지배적인 것은 인류 진화의 산물이란 말입니다. 물론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앞서 미국 언론이나 우리나라 언론이나 마치 미국 자동차 산업과 우리 경제 망하기를 바라는 것 같이 보도하는 행태를 보면 도를 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이스터브룩은 마찬가지입니다. 비관주의가 학계에서부터 시작돼 공론의 광장으로 유행처럼 퍼져나갔다고 지적합니다.

 

실제로 그는 책에서 이렇게 강조합니다.

 

“오늘날 조금 배웠다는 사람은 세상이 곧 무너질 것같이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회통념이 되어버렸다. 모든 게 끔찍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취급을 받을 정도다.”

 

정말 그렇지 않나요? 경제가 좋다고 낙관론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경우가 은근히 많죠. 조카들이 잇따라 취업했고 출퇴근시간 지하철에 직장인이 많다고 이야기해도 언론들이 떠벌리는 취업대란만을 언급하는 분들이 꼭 있습니다. 그러면서 실상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 취급을 하죠. 소위 언론계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이런 비관론을 설파하는 경우가 특히 많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우선 언론의 습성이 이에 한몫합니다. 낙관론보다는 비관론을 설파해야 신문이나 뉴스가 팔리기 때문이죠. 이는 과거부터 반복돼 왔습니다. 좋은 소식보다는 나쁜 소식이 훨씬 빨리 퍼지는 것을 우리는 자주 목격하잖아요.

 

게다가 기자들의 직업 환경 변화도 빼놓을 수 없다고 이스터브룩은 지적합니다. 광업과 제조업등 요동쳤듯이 기술 변화로 인해 기자사회도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죠. 이게 뭔말일까요?

 

미국에서 종이 신문의 구독률은 1957, 하루에 2.8명당 1부로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구독률은 7.7명당 1부입니다. 이에 따라 기자들의 급여 수준이 실질가치 기준으로 꾸준히 떨어지고 있습니다. 한때 안정성을 보장했던 기자 직종은 복지혜택 없이 쉽게 해약될 수 있는 계약직으로 바뀌고 있죠. 우리 언론들도 마찬가지죠.

 

이런 상황 변화는 모를 바는 아닌데 이것이랑 비관론이랑 뭔 상관이 있을까요? 사람은 자신이 처해진 상황 속에서 세상을 바로 본다고 하죠. 기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년 전만해도 제 4의 권력이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부러움을 샀던 기자들이 이제는 기레기라는 비하를 받을 정도로 상황이 급변했죠. 게다가 신문과 TV 등 주류언론의 위상은 물론 영업은 날이 갈수록 축소되고 연봉도 덩달아 줄어들고 게다가 계약직, 프리랜서 기자들이 늘어나니 불만도 가중될 수 밖에 없죠. 이런 기자 자신들의 불만을 알려진 모든 수단, 즉 기사를 통해 확산시키는 것입니다. 아무리 경제가 좋아져도 자신들의 연봉이 오르지 않고 고용이 늘어나도 옆에서 짤리는 기자만 보이니 좋은 소식은 애써 눈을 감는다는 것이죠. 그리고 나쁜 소식만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조국 청문회 때 왜요라며 한껏 불만을 드러낸 기자도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만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이런 기자들의 불만 표출이 트럼프 당선을 만들기도 했다고 이스터브룩은 주장합니다. 실제로 2016년 미국 고용이 가파르게 상승했을 때입니다. 뉴욕타임스는 긍정적인 경제 뉴스가 자신들의 논조에서 벗어났다고 여긴 나머지 실업률이 떨어졌으나 많은 사람들이 일시적 현상이라고 느낀다는 실망스런 1면 기사를 냈습니다. 요즘 우리 언론들의 행태랑 똑같죠.

 

그런데 이런 행태는 트럼프가 당선된 후에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2017년 봄, 미국의 실업률이 4.4퍼센트로 떨어졌을 때 미국의 3대 방송사 저녁 뉴스 프로 가운데 어느 곳도 이 멋진 소식으로 프로그램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3개 방송사 모두 이 기사에 20초 미만을 할애했습니다. 심지어 ‘ABC 월드뉴스 투나잇은 일자리 창출이 금리 상승을 유발할 수 있다는 부정적인 내용을 덧붙였습니다. 일자리가 늘어나니 경제가 좋아질 것이란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금리 상승으로 서민들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은근히 부추긴 것이죠. ‘NBC 나이틀리 뉴스는 이달 수치가 놀라움에도 불구하고 지난달 수치는 부진했다며 불만 섞인 보도를 했습니다. 지난 8월 고용대박이 지난해 고용참사에 따른 기저효과 때문이라고 보도하는 국내 언론들과 어쩜 이리도 똑같을까요?

 

비관주의가 도를 넘어 확산하는데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미국의 갤럽은 수십 년간 다음과 같은 내용의 질문에 대한 여론조사를 매달 정기적으로 실시했습니다. “당신은 일반적으로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만족하는가, 아니면 불만인가?” 그런데 미국인의 과반수가 만족한다고 답한 마지막 조사가 2004년 겨울이었습니다. 그 이후 다수의 응답은 계속 부정적이었죠. 특히 최근 몇 해 동안 미국인의 평균 70퍼센트가 미국의 상황에 대해 불만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2004년 겨울에는 갤럽 조사의 측정치가 긍정에서 부정으로 선회한 것을 넘어서는 중요한 사건이 하나 일어났습니다. 페이스북이 정식으로 사업을 개시한 것이죠. 물론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인과관계가 성립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무언가 연관성은 있을지 모른다고 이스터브록은 설명합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요? 페이스북은 이용자가 원하는 것이면 사실상 무엇이든 공유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기능과 장점을 가진 플랫폼입니다. 그런데 특징이 있죠. 바로 부정적인 것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페이스북은 부정적인 것을 확산시키는 기술을 계속 내놓고 있고요. 물론 이를 공표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페이스북에 있는 많은 콘텐츠가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 음모론, 비탄, 추문에 대한 것들이란 점이 이를 반증하고 있죠. 특히 이런 부정적인 내용은 빠르게 확산됩니다. 끔찍한 학대행위를 암시하는 내용에 뭔지 모를 흐릿한 사진을 첨부하면 당장 하는 반응을 유발하죠. 하지만 생활수준과 교육수준, 개인의 자유, 수명이 점진적으로 향상됐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실제로 퓨 리서치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화를 내거나 비관적으로 언급한 페이스북 게시물이 칭찬하거나 중립적인 게시물보다 5배나 더 많은 좋아요와 공유를 이끌어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이스터브록은 페이스북과 이와 유사한 소셜미디어는 놀랍도록 짧은 시간 내에 사실처럼 들리도록 할 수 있는화력을 배가시켰다고 강조합니다.

 

그럼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을 낙관적으로만 생각해야 하는 것이냐. 실제로 장 지글러가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에서 지적했듯이 아직도 지구 어딘가에서는 5초마다 어린아이가 굶어죽고 있는데도 이를 외면하라는 것인가?

 

이스터브록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세상의 상황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낫다는 것이 현실에 안주하거나 자만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라고요. 기아는 물론 불평등, 인종 갈등, 기후변화, 불법이민, 난민, 지역 분쟁, 부실한 공교육 등 만만치 않은 도전에 직면해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과거의 사례에 비춰보더라도 비관주의는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비관주의는 범죄와 공해 감축, 질병 관리, 빈곤 감퇴, 식량 공급, 안전, 전쟁 억제, 민주주의 확산, 자연자원 보호 등의 문제에 대해 제대로 예측하지도,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비관주의는 거의 항상 형편없는 길잡이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스터브록은 공포에 찬 비관주의를 해체하는 대신 희망적인 낙관주의로 무장할 것을 주문합니다.

 

“‘걱정 말고 행복하자’고 말하는 게 아니다. 실은 걱정할 것이 너무 많다. 그러나 걱정은 하되 낙관적인 태도를 가지자는 것이다. 낙관주의는 우리가 세상의 많은 잘못과 결함에 눈감도록 하지 않는다. 대신 낙관주의는 우리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을 시작하면 문제가 풀릴 수 있다는 확신이자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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