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불진 이피디의 경제공부방
75년 동업 깬 ‘경영권 다툼’···고려아연·영풍 갈등 진짜 원인은? 본문
요즘 가장 핫한 비즈니스 이슈를 꼽으라면 단연 ‘고려아연’일 것입니다. ‘3조 쩐의 전쟁’ ‘국부유출 vs 경영부실’ ‘1인 1주식 갖기 운동’ 등 각종 이슈가 끊이질 않고 있기 때문인데요. 이러는 사이에 주가까지 출렁거리고 있는데요. 도대체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고 앞으로 전망은 어떤지를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사태에서 드러난 우리 기업의 민낯도 뜯어볼까 합니다.
◆‘75년 동업’이 깨졌다
‘이번 사태로 동업이 3대 이상 이어지는 것이 쉽지 않다’는 업계 격언이 다시금 회자되고 있습니다. 고려아연은 국내 재계 32위 영풍그룹의 핵심 계열사입니다. 그런데 영풍그룹은 황해도 출신 장병희 창업주와 최기호 창업주가 1949년 공동 설립했죠. 사업 시작 반년 만에 6·25전쟁으로 사업을 접어야 했지만 피란지인 부산에서 회사를 다시 세웠습니다.
이후 영풍은 1970년 경북 봉화군 석포면에 석포제련소를 건설했고 1974년 고려아연을 설립했는데요. 두 가문은 석포제련소는 장씨가, 고려아연 온산제련소는 최씨가 맡는 등 사업 영역을 구분했지만, 그룹 회장은 번갈아가면서 맡았습니다. 주요 계열사 지분도 대부분 공유했죠. ‘한 지붕 두 가족’ 체제이지만 그동안 큰 문제가 없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심지어는 본사도 같이 써왔고 두 기업 직원들도 자유롭게 교류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3세들이 2022년 말 경영전반에 나선데다 영풍그룹 계열사가 늘어나면서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는데요. 현재 영풍그룹의 계열사는 무려 97개. 너무 많아 각 계열사가 최씨 일가 혹은 장씨 일가 중 어디와 가까운지 살펴보려면 한참 걸립니다.
게다가 고려아연은 최씨 일가가 이사회를 장악하고 있지만, 최대주주는 장씨 일가입니다. 반대로 서린상사의 경우 최대주주는 최씨 일가이지만 경영은 장씨 일가가 맡아왔습니다. 간략히 살펴보면 ‘고려아연->서린상사->영풍->고려아연’으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덕분인데요.
이렇게 순환출자를 하는 이유는 다들 아실 것입니다. 적은 지분으로 전체를 지배하기 위해서죠. 두 가문이 이런 꼼수에 동조해 왔던 것이고요. 그런데 이런 꼼수가 영원히 통할 수는 없겠죠.
특히 꼼수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서로가 딴 마음을 품을 수 있죠. ‘잘만 하면 내가 다 먹을 수 있겠는 걸’ 이런 생각이 들기 마련이죠. 실제로 최기호 창업주 손자인 현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이 전면에 나선 2022년부터 한화·LG화학 등과 고려아연 자사주(회사가 보유한 자기주식)를 맞교환했습니다. 우호지분을 확보해 지배력 강화에 나섰다는 평가를 받았죠, 당연히 공동 창업을 한 장씨 일가 쪽 입장에서는 최씨 일가가 회사 돈으로 고려아연을 독차지하려 했다는 의심을 할 수 밖에 없고요.
이런 의심이 추석 직전부터 터져 나온 것입니다.
◆현 경영진 문제있나
장씨 일가와 영풍은 혼자 힘으로는 최씨 일가를 막기 힘들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사모펀드 운용사인 MBK파트너스와 손을 잡았죠. 이를 바탕으로 고려아연 주식 공개 매수에 나섰습니다.
당연히 명분도 있어야겠죠. 앞서 설명한대로 75년 동업정신을 깨고 최 회장이 자기 이익을 위한 경영을 했다는 주장입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겠죠. 그래서 최 회장이 본업과 무관한 고위험 사모펀드 투자를 주도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데요. 카카오의 SM엔터테인먼트 인수 과정에서 시세 조종(주가 조작)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는 원아시아파트너스 사모펀드와 관련이 있다는 거죠. 고려아연이 수천억원대 유보 현금을 투자했다가 거액의 평가손실을 냈는데 이건 심각한 문제라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고려아연의 지난해 말 기준 주가순자산비율(PBR)은 1.10. 주가가 장부상 청산가치와 엇비슷한다는 의미입니다. 최근 주가가 급등해 1.56배로 늘어나긴 했지만 세계 1위 비철금속 기업인데다 영업이익이 연간 8000억원이 넘는 회사치고는 낮죠. 이건 경영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니 더 이상 회사를 맡길 수 없다는 주자입니다.
◆ 영풍·사모펀드는 문제없나
가만히 있을 최씨 일가가 아니겠죠. 최 회장 쪽도 영풍의 지배구조와 먹튀 우려를 반격 카드로 들고 나오고 있는데요. 고려아연 최대 주주인 영풍이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로 대표이사 2명이 모두 구속된 상태라는 점을 거론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MBK와 공개 매수를 결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거죠.
여기에 국부유출 논란까지 부추기는데요. 사모펀드의 성격상 기업 경영권 인수 이후 재매각을 통해 이익을 얻을 것이 뻔하다는 거죠. 그렇게 되면 세계 1위 고려아연의 기술력이 국외로 유출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왜 이렇게 주장할까요? MBK가 목표로 하는 10조원 규모 펀드에 중국 연기금인 중국 투자공사가 5000억원 정도 투자한 것도 거론합니다. 중국 자본이 고려아연을 먹는 것 아니냐는 거죠.
물론 그런 우려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계산해보면 중국 자본비율은 겨우 5%. 이걸 가지고 중국 먹튀를 거론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실제로 MBK도 고려아연이 한국의 기간산업을 책임지고 있는 점을 잘 알고 있다며, 기자회견까지 자청해 “절대 고려아연을 중국에 팔지 않고 국내 대기업에 매각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다만 이것도 문제가 있죠. 이 약속을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습니다. 팔고 난 뒤에 어쩔 수 없었다고 발뺌하면 그만이라는 거죠.
◆앞으로 관건은?
그럼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까요? 우선 다음달 4일까지 진행하는 장씨 일가와 MBK의 고려아연 주식 공개 매수가 성공하느냐가 가장 큰 관건인데요. 이들이 제시한 공개 매수 금액은 주당 66만원으로, 현재 주가(23일 종가 기준 주당 72만3000원)보다 낮습니다. 이러면 공개매수에 응할 주주가 없겠죠. 따라서 공개 매수가를 상향 조정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글로벌 독립 리서치업체 스마트카르마는 공개매수가를 90만원으로 올릴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연일 오르던 주가는 어제 빠졌기 때문에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최 회장이 자사주 맞교환, 제3자 유상증자 등을 통해 적잖은 고려아연 지분을 보유한 한화·현대차·LG 등 대기업들을 우군으로 끌어들이고 있거든요. 이에 더해 최 회장이 추가 자금을 동원해 ‘대항 공개 매수’에 나설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옵니다.
여기에 한가지 변수도 생겼습니다. 영풍·MBK파트너스가 기간 연장 없이 공개매수 가격을 높일 수 있는 마지노선이 당초 알려진 24일이 아니라 26일로 확인됐다는데요. 휴일이 껴있기 때문이라는데요. 결론적으로 최씨 일가가 실질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날짜는 4거래일로 줄어들게 됩니다. 그만큼 불리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돈 앞에는 양보없는 재벌가의 민낯
여기서 반드시 짚어볼 점이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75년 동업이 왜 깨졌는가 하는 점입니다. 왕조국가도 아닌데 상속이라는 황당한 제도가 우리 재벌에 남아있기 때문 아닐까요? 빌게이츠, 워런버핏도 자식들에게 회사를 물려주지 않는데 우리나라는 경영권 승계를 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지 모르겠습니다. 북한의 3대 세습은 비판하면서도 말이죠.
게다가 정당한 지분으로 그룹을 지배한다면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꼼수를 써서 자기 돈이 아닌 남의 돈으로, 적은 지분만 가지고 그룹을 지배하고 계열사를 늘리잖아요. 그러다 보니 이런 사단이 불거진 것이죠.
특히 갈라지는 모습도 깨끗하지 못합니다. 고려아연 측이 19일 배임 혐의로 장형진 영풍 고문과 김광일 MBK파트너스 부회장 등을 고소했습니다. 영풍이 고려아연 주식을 저가에 MBK파트너스에 넘겨 영풍 법인과 주주들에게 재산상 손해를 입혔다는 혐의입니다. 검찰은 다음날 바로 수사에 착수했고요.
75년전 동업을 시작했던 장병희 창업주와 최기호 창업주가 하늘나라에서 어떤 생각을 할까요? “자식들에게 물려줬더니 이런 꼴 나지”라고 한탄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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